문라이트, 세 번의 삶, 한 번의 사랑

베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

by 백승권






인간 흑인 인간 동성애자 인간 마약상 인간 친구 인간 아들 인간... 한 가지로 불릴 수 없는 삶이 있다. 부르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재단될 수 있다. 그리고 불리는 사람의 그 편의에 따라 자신을 정의하기도 한다. 정체성이란 어쩌면 스스로가 아닌 타인들이 각자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조립해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누구인가는 영원히 안고 갈 질문이다. 답이 없구나 라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숨을 거둘 때까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리틀(알렉스 R 히버트), 셰이론(에쉬튼 샌더스), 블랙(트레반테 로데스). 한 명의 육체, 세 개의 이름. 나는 대체 누구일까.


누구도 여자의 몸을 거치지 않고서는 세상에 나올 수 없기에, 엄마란 운명적 관계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다. 엄마의 피, 땀, 눈물, 모든 것이 배어 있는 생명은 몸이 커져갈수록 자신을 낳아준 이의 실체를 목격한다. 아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집에는 허구한 날 마약을 들이켜는 정체모를 남자와 그를 집에 들여온 엄마(나오미 해리스)가 휘청거리고 있다. 학교에서 호모라고 불리며 맞는 아이, 리틀. 흙과 나무와 공기까지 마약에 찌들어 있을 듯한 동네에서 리틀은 후안(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에 의해 위기를 모면하고 의지하기 시작한다. 그는 건장한 체격, 자신감 넘치는 태도, 비싸 보이는 차와 좋은 집, 매력적인 여자 친구(자넬 모네)까지 있었다. 아버지의 대안. 그가 그 동네를 휘어잡는 마약상이고 엄마를 찌들게 한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인생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꼬여버릴 수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한 소년의 미래가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성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리틀의 호칭이 셰이론으로 바꿔 불린 들 나아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여전히 괴롭히는 무리들이 있었고, 말수는 늘지 않았다. 엄마는 마약에 더 찌들어 갔으며 감정의 기복 또한 심해졌다. 후안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 친구가 생겼다. 문라이트가 쏟아지는 푸른 해변에서 시어 같은 대화가 오간 뒤 둘은 키스한다. 첫 경험.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셰이론은 더 이상 맞고 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고 경찰에게 끌려나간다. 가해자는 따로 있었지만 셰이론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마약상과 중독자가 판치는 동네, 마약중독자 엄마, 동성애로 놀림받고 있는 흑인. 그의 폭력이 정당방위가 아닌 일방적 범죄로 해석될만한 환경이 완벽할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블랙은 감옥에서 나온 후 생의 경로를 완전히 바꾼다. 리틀과 셰이론의 어떤 흔적도 그의 외형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거구의 몸집, 터질듯한 근육, 목과 팔목에 휘감고 치아 전체에까지 씌운 금덩이, 비싼 차와 많은 현금. 후안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과거 동네 최약자 취급을 받으며 폭력에 시달리던 블랙은 현재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마약 거래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언제라도 쏠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에 둔 총이 일상의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갖춘 권력으로 둘러싸여 있는 듯했지만 외로움의 위치는 더 낮고 깊어져 있었다. 엄마와의 멀어진 거리만큼 그는 독립된 개체로서 균형 잡혀 보였지만 처연한 몰골로 모정을 고백하는 어미 앞에서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불이 꺼진 시간, 전화를 받은 블랙은 몽정을 한다. 그였다. 첫 경험, 케빈(안드레 홀랜드).


케빈을 다시 만난 후 블랙은 수줍어 보일 정도로 밝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마치 숨겨져 있던 그날 해변의 셰이론에 잠시 빙의된 것처럼 둘은 설렘 가득한 드라이브를 즐긴다. 케빈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블랙은 둘만이 간직한 과거의 정서를 소환하고 케빈의 표정은 혼란스러워진다. 둘은 다시 가까워진다. 블랙은 일생 단 한번 경험했던 빛을 되찾는다. 다시는 꺼트리지 않을 것처럼.


리틀, 셰이론, 블랙. 하나의 몸이었던 그들(그)의 침묵은 본성이 아닌 생존을 위한 선택 같았다.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할 수도 보호할 수도 없었으니까. 마약에 찌든 아들을 외면한 엄마, 엄마를 그렇게 만든 마약상 후안, 첫사랑이자 주먹질을 퍼부었던 케빈까지. 생의 가장 예민했던 순간에 만나 의지가 되어야 했던 존재들이 가장 큰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 상처들에 의해 리틀은 셰이론이 되고 블랙이 되었다. 타의에 의해 껍질과 내면이 형성되는 생. 문라이트는 희망을 설득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달빛과 파도소리로 가득했던 그날 밤이 당신에게도 남아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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