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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r 20. 2017

사일런스, 고문기술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 사일런스





고문은 의지를 꺾는 흔한 방식이다. 집단 대 집단, 전쟁 또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은 고문에 대한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해 왔다. 강렬하고 폭압적인 고통을 통해 생각과 의견을 바꾸고 원하는 결과로 반응하게 하는 것. 물론 고문을 가해자들이 유희로 즐기는 사례도 많지만, 고문은 가하는 자와 당하는 자에게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는 노동행위로써 필요악으로 자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말로 설득하다가 안되면 고문이 가해졌다. 수순이었고 당하고 견디는 이들도 고문의 상황에 처했을 경우 이런 고통을 각오하곤 했다. 여기서 고문의 의미와 종류, 해악을 논하려는 건 의미가 없다. 고문의 범위는 파고들수록 광대하고 역사와 흔적 또한 책으로 뒤덮일 만큼 방대하다. 신의 복음을 따르고 대륙을 넘어 전파하려던 천주교인들이 당한 박해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다. 영화는 재구성의 산물이고 실화와 기록을 바탕으로 했다. 고문은 실제로 일어났다. 당한 자들과 가한 자들이 있었고 가했던 이유와 견디고 죽어갔던 이유가 있었다.


17세기 포르투갈 신부들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의 말씀을 전파하고 (신을 제대로 모르는, 알고 싶어 하는) 무지한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사명에서였다.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국경을 넘어오는 것은 침략으로 보였다. 일본 기득권 입장에서는 서구 세력들이 자국민의 정신을 오염시키며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경계했고 엄금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운명처럼 개인과 집단을 혼돈에 빠뜨리고 서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각자 주장하며 물리적 정신적 대립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는 그 중심에 있었다.


존경받는 사도였고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귀감이자 상징이었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뜻을 바꾸고 일본에 귀화했다는 소문이 돈다. 대표 스트라이커가 막강한 경쟁팀으로 이적한 것만큼 충격적이었다. 믿을 수 없고 진상을 파악하러 나선다.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신부와 가루프(아담 드라이버) 신부가 자원한다. 제다이와도 같은 존재였던 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발리그나노 신부(시아란 힌즈)는 만류한다. 죽으러 가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순교를 각오하는 행위였다. 지독한 박해가 따를 것이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덮칠 것이 뻔했다. 하지만 혈기로 가득한 그들은 결국 바다를 건넌다. 이것은 어쩌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도 마찬가지 미션이었다.


일본의 마을 사람들은 순박해 보였다. 숨어서 예배를 드리며 십자가를 섬겼다. 두 신부를 보자 신의 존재를 재확인한 듯, 엎드려 경배한다. 그들이 가져온 신의 상징들을 앞다투어 원한다. 마을의 질서를 다잡아야 하는 재판관 이노우에(잇세이 오가타)에겐 존재 가치가 없어 보였다. 페레이라 신부에 대해 수소문하지만 요원했다. 그 사이 적발된다. 가장 믿을 수밖에 없었던 기치지로(쿠보즈카 요스케)의 밀고였다. 시련이 시작된다. 이방인 선교사 로드리게스와 가루프의 의지를 꺾기 위해 이노우에는 고문을 시작한다. 눈 앞에서 서양 신을 섬기고 신부들을 보호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목을 벤다.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너희들의 신이 그려진 석판을 밟아. 이렇게 너희의 신을 부정하라. 하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라. 통역관은 부추긴다. 형식입니다. 겉으로 따르기만 하세요. 마을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린다. 거친 파도가 그들의 피부를 부수고 있었다. 그들은 신을 향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며칠 동안 밤낮없이 파도 속의 십자가에 매달리다가 죽고 시신은 불태워 처리된다. 그 전에도 애어른 할 거 없이 산 채로 불에 태워져 죽고 있었다. 신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의 존재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로드리게스는 경악한다. 이노우에는 말한다. 저들은 신이 아닌 너희 때문에 죽는 거라고. 속절없이 죽어가는 마을 사람들의 눈에 두 이방인 선교사는 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천국의 메시지였다. 천국이 눈앞에 닥쳤는데 현세의 비참한 생활과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로드리게스는 감금되고 가루프는 타 마을로 피신한다. 기치지로의 배신은 고해성사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배신 후에는 다시 고해성사가 요청되었다. 기치지로에게 자신이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신이란 존재는 이를 계속 용서해주는 절대자였다. 용서가 계속되는데 죄가 멈출 리 없었다. 사람들은 계속 죽어간다. 같이 떠나온 가루프마저 물속에서 참살당하는 마을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한다. 로드리게스에게 길이란 없었다. 본질이 사라지고 있었다. 혼란에 빠지고 신에게 항변한다. 왜 아무 말도 없냐고. 왜 이렇게 극한 상황 속에서 당신은 어떤 기적과 응답도 보여주지 않고 있냐고. 그리고 마침내 페레이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평온해 보였다. 페레이라는 설득한다. 이들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로드리게스는 저항하지만 눈앞에서 그를 의지하던 마을 사람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극단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저들을 죽이는 것은 신이 아닌 너라고 주변에서 강권한다. 신을 부정하고 돌아설 것을. 그들의 편에 서서 목숨을 연명할 것을. 일본인의 삶 속에 들어올 것을. 페레이라는 신과 자신 사이에서 절체절명의 고뇌에 빠진다. 신의 침묵을 원망하고 한쪽을 선택한다.


영화는 페레이라 신부가 화산지대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주민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화산지대의 물이 매달린 주민들에게 조금씩 뿌려지고 있었고 이는 배려가 아닌 극심한 고통의 연장을 위해서였다. 살이 타들어갈 듯한 고통에 휩싸이고 있었고 그렇게 견디고 몸부림치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페레이라 신부는 사익을 취하며 등 돌린 배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깊이 깨달은 자였고, 신을 향한 무수한 부르짖음 끝에 자신의 의지가 더 이상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무겁지 않다는 쪽을 선택한 이방인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보여준 신을 따르며 죽어가는 모습을 끊임없이 봐야 했을 때,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면서도 그는 결단한다. 미래의 희생을 멈추고 감시자로 돌아선다. 그와 같은 과정을 로드리게스가 고스란히 밟고 있었고 누구보다 그가 느낄 혼란과 절망을 잘 알고 있었다. 결단 이후 고문은 멈추고 외적인 평온이 찾아온다. 삶은 계속된다.


신은 보이지 않는다. 신이 계신다고 믿는 자들의 말과 행동으로 증명된다. 확신을 가지고 이끄는 자들이 있고 이를 듣고 의지하며 따르는 자들이 있다. 계급이자 질서고 동력의 전부다. 신의 상징에 매달려 인간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이들을 이끌던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문을 지시한 자들은 이점을 알고 있었고 집단 최면을 멈추라고 유도한다. 죽거나 부정하거나였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장 격렬하고도 완전하다고 여긴 믿음을 선택하며 잔혹한 방식으로 사라져 갔다. 살 타는 냄새가 해변을 가득 채웠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으며 핏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종교의 영토는 그렇게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한 절대적인 의지와 주장, 그 대가로 치러진 희생을 통해.


원망은 당연했다. 신을 부정하는 일은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신을 증명하는 일은 온몸이 도륙 날 때까지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신이 이토록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절대자라는 점을, 목숨을 바치며 말하고 있었다. 누구도 신을 위해 죽은 자들이 신에게 갔는지 직접 보지 못했다.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었다. 믿음. 믿음을 가르치는 자들조차 부들부들 떠는 상황에서조차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신의 침묵은 눈앞의 어떤 비극도 죽음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의 얼굴이 그려진 석판을 밟은 로드리게스는 엎드려 오열한다.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고 믿었던 신에 대한 믿음이 결국 패배했음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인간을 향한 폭력을 신에게 가함으로써 주변이 조용해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초기화되고 있었다. 신을 몰랐던 때보다 신을 선택한 이유로 고통받는 지금이 정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배신은 삶의 끝이 아니었다. 생존의 시작이자 열쇠였다. 기치지로가 그랬듯, 배신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만인이 고문당하기 전에 바짝 엎드려 믿음을 부정하고 목숨을 구걸했으면 누구도 당사자 역시 해를 입지 않았을 텐데.라는 가정은 고문보다 잔인하다. 가지 않은 길을 짐작만으로 서술하는 것은 이전의 선택조차 송두리째 가치를 말살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고문의 고통을 초월할 정도로 지켜내고 싶었던 믿음의 정체를. 사이비 종교의 집단 자살 같은 것일까. 의지박약인 자신의 의식세계를 바꿔놓은 존재를 향한 지나친 확신에서 비롯된 완전한 착각의 최종 결론 같은 것일까. 삶에 대한 의지가 희미한 상태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욕망이 부풀어 오른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음을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을까. 개인의 죽음이 천국의 벽돌 한 조각으로 더해질 거라고 여겼던 걸까. 진정. 선교사들조차 그의 침묵에 괴로워했었다. 침묵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동안에도 설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고난은 계획된 것이라고. 예정되어 있었을 거라고. 자신은 이렇게 쓰임 받기 위해 선택되었고 그 축복을 경험하고 있는 거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어야 했을 것이다. 끝내 신을 선택한 인간들은 삶과 죽음을 누추하게 만들며 자신을 버렸다. 이를 경험한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신화로 남아 교육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신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죽어간 자들과 죽음을 예비하는 자들에 의해. 침묵을 해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에 의해. 이 모든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을까. 신의 다른 이름은 고문기술자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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