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 신도시 부적응자의 고백

이수연 감독. 해빙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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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모든 신도시는 강남을 꿈꾼다. 강남을 벗어난 이들이 정착한 곳. 깎아내린 산과 파헤쳐진 땅 위에 아파트 숲이 뒤덮고 상가들이 올라온다. 이곳의 과거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온통 새로운 것들로 뒤덮인다. 새 도로가 깔리고 그 위에 새 가로등이 꽂힌다. 새 도로명이 쓰인 표지판과 새 가로수가 심어지고 새로운 학교 건물과 그 사이사이를 새로운 대중교통수단과 새로운 정착민들의 자동차로 채워진다. 각자의 이유로 이사 온 사람들. 모두 강남에서 온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지만, 신도시의 의견을 주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대부분 제2의 강남이 되기를 꿈꾼다. 그래야 자기가 제2의 강남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는 프리미엄 아파트들, 익숙한 브랜드의 커피숍, 맛본 적은 없지만 유명하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음식점들, 도심에서 쉽게 눈에 띄었던 고가 수입자동차들, 그곳을 오가며 채우는 의식한 옷차림의 사람들, 그들이 미는 유모차들, 주변에 계속 지어지는 건물들, 그중에 어떤 것은 대형 마트, 어떤 것은 백화점, 어떤 것은 멀티플렉스 극장, 이젠 강남의 판박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새로 지어지는 도시를 채우는 익숙한 상징물들. 역사가 없는 도시에 이사 온 사람들은 모두 타향살이라는 낯선 시작을 각오한 사람들이다.


강남에서 병원을 차렸다 망한 것처럼 보이는 승훈(조진웅)은 경기도 (화성시로 추정되는) 어느 신도시로 내려와 내시경 검진을 주업으로 먹고 산다. 그의 꿈속에 계속 등장하는 비닐봉지 속의 잘린 사람 머리. 머리 잘린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들리고 승훈은 1층 정육점을 운영하는 집주인 부자(신구, 김대명)를 의심한다. 오랫동안 이 동네의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며 같은 의심을 품었다는 은퇴한 형사까지 가세하면서 승훈의 의심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진다.


의심은 강박이 되고 승훈은 자신의 방 냉동고에 잘린 머리가 담겼다고 의심되는 비닐봉지를 확인한다. 정육점 부자가 꾸민 음모라고 확신하고, 주변의 인물들과 상황에 극도로 민감해진다. 양육 문제로 찾아온 부인이 사라졌다고 믿고 자신에게 친절하던 정육점 사내의 부인이 사라졌다 믿으며 자신과 같이 일하는 간호사 역시 자신을 찾아왔다가 실종되었다고 믿는다. 의심의 끝은 모두 정육점 부자에게로 향하고 그들이 시체를 손질하는 듯한 환영까지 경험한다.


해빙의 배경인 신도시는 실패한 서울인들의 도피처다. 그들은 A코스를 밟으며 상류로 거론되는 직업적 지위까지 획득하지만 완전한 정착까지 이르지 못한다. 도미노처럼 결혼까지 흔들리고 아이의 양육권까지 다투게 된다.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에서 안정적 서식을 꿈꾸다 생의 중간지점에서 미끄러진다. 정정. 미끄러진 정도가 아니라 추락한다. 얼음이 녹은 강변에 떠오른 목 없는 시체. 시체의 남은 부위가 멀리 도망친 자의 눈 앞에 아른거린다. 모든 실패가 타인을 해하면서 끝나지는 않지만 실패가 당사자만 쓰러뜨리는 경우는 없다. 실패는 결국 당사자와 그 주변을 폐허로 만든다.


얼마나 훌륭한 가면을 썼느냐가 모두의 눈을 더 오래 가릴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나눠 쓴 이들이 흔적을 밟는다. 의심은 헛스윙을 반복한다. 어떤 살인은 애써 망각된다. 하지만 망각되는 죽음은 없다. 다른 살인과 죽음을 따라다닐 뿐. 영화는 아주 가까운 이웃의 살인에 대해 괴담과 현실 사이를 부유한다. 과거와 현재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꿈과 회상이 그 사이를 충분히 메우지 못한다. 살인이 일상이 된 이와 살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가 뒤섞인다. 그곳이 꼭 산과 들판을 파헤칠 신도시일 필요는 없었겠지만 서울과의 물리적 거리 만으로도 충분히 낯섦과 불안의 대상이 된다.


위기를 감지했을 때, 자신이 그 핵심 대상이자 중심이라는 착각은 흔한 일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공포는 상상력의 등에 올라타 내면으로 질주한다. 근원을 끝내 파악할 수 없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 때 결국 그 자리를 의심과 편견, 방어기제가 대체한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가해자와 동조자로 인식되고 인식된 이상 환경마저 다르게 보이고 느껴지게 된다. 서울과 강남을 벗어난 들 자기 머릿속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머리가 잘리지 않는 이상,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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