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빙, 사랑해

제프 니콜스 감독. 러빙

by 백승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타인의 반대에 부딪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질감이 있다.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랑이라는 오묘한 감정에 대해 세계의 창조주인 것처럼 객관적이고도 현실적이라며 잣대를 드리우는 사람들. 소란들. 역겨움들. 귀를 막고 등을 돌리려 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의 목소리가 굵고 커질수록 사랑하는 이들이 서 있는 곳의 면적은 점점 작아진다. 너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하고 있지 않으니 그래서 우리가 너무 불편하니 우리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선 밖으로 나가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감옥에 들어가던지.라고 판결할 수 있으니까. 사랑을 한단 이유만으로 추방을 당한다. 어떤 세계에서 사랑은 불법.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피부색이 다르고 심지어 성교의 방식이 달라도 추방의 대상이 된다. 러빙은 전자의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된다. 굳이 나와 내 주변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왜 저들은 저토록 과감하고도 열정적으로 실행하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상들의 노예밖에 안 되는 흑인 여자와 멀쩡해 보이는 백인 남자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다니. 말세네, 말세. 리처드 러빙(조엘 에저튼)과 밀드레드(루스 네가)를 보는 시선들이 이랬다. 그들의 반대는 법의 집행자의 심기까지 건드렸고 법은 러빙 부부를 고향과 터전 밖으로 나가라고 선언한다. 어기면 감옥행이었다. 밀드레드는 막 아기를 낳은 후였다.


사랑을 죄로 규정짓는 지역에서 사랑하는 이들은 괴로웠다. 최악을 면하기 위해 판결을 이행했지만, 이대로 늙어가기엔 아이들은 자라고 가족들은 병들어갔다. 타향에서 남은 생을 치르고 숨을 거두기엔 고향이라는 뿌리는 단숨에 잘리지 않았다. 버텨야 했다. 소송을 시작한다. 우리의 선택이 더 이상 흑인이 백인의 노예라고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틀리지 않았노라고. 우리의 사랑은 정당하고, 이 나라의 바뀐 법 안에서 이것이 왜 금지되어야 하는지 끝까지 이해받고 싶다고. 이것이 최대 다수의 사람다운 삶을 지향하는 나라 안에서 벌어질 일이냐고. 이슈를 제기하고 관심을 이끈다. 말만 들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처드는 움직임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표정, 과묵함, 되려 보수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흑인이 아닌 밀드레드를 사랑했고, 그녀와 평생을 약속했으며 이를 지켜가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같이 돌파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모든 뜨거움을 언어화시킬 수 없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시간이 이를 입증했다. 밀드레드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바뀌지 않는 현실이 더 가혹하게 느껴졌다. 사랑은 허락되어야만 가능한 행위였다. 밀드레드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들을 닮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난 이 영화의 결론이 궁금하지 않았다. 리처드와 밀드레드. 러빙 부부가 같이 있는 장면 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 이미지는 이미 이를 경험하는 타자들을 위한 것이지만, 본질의 가장 진한 형상화이기도 했다. 둘은 현실을 옮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거친 질감에도 불구하고 둘은 시간과 법과 눈빛과 오랜 친구들의 폭언 속에서 꺼지지 않는 온기를 간직하고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대하는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었고 실질적인 의지는 서로와 자신에게 밖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외로웠을 것이다. 어떤 선택의 결과가 이토록 혹독한 결과를 낳을 줄 알았을까. 내내 낯설어하며 얼마나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곱씹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실화였으니까.


누가 투쟁을 위해 서로를 사랑할까. 누가 세상과 싸우는 사랑을 예비할까. 집단을 나누고 서로를 계급화하지 않으면 세계가 돌아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랑은 그저 사랑일 수 없었다. 질서의 톱니바퀴를 뒤흔드는 불쾌한 모래알이었고,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한정된 지식의 완전한 부정이었으며,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도 했다. 자신과 다른 선택과 행동이 공공의 질서를 해치는 불법으로 규정되길 원했고 시스템의 합의가 이것이 장기적 번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엄중히 선고할 때까지, 오염된 인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내 괴롭혔다. 사랑과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시스템이 허락한 다음에야 사랑은 겨우 회복된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안전한 선택을 하면 되지 않았냐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모든 선택은 집단의 허용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일 테다. 사랑이 어떻게 그럴까. 인간의 감각적 활동 중 이성과 논리의 원칙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영역인데, 오랜 진화를 거쳤음에도 여전히 충분히 말과 글로 설명되지 않고, 그림과 노래로 다 표현되지 않았으며, 끝나지 않을 듯한 속도로 연구가 이뤄지는 분야인데. 한번 마음의 온도를 정한 사랑이 누군가 반대한다고 포기될 수 있을까. 숨이 끊어지면 개인의 역사는 끝나겠지만, 이야기는 남는다. 사랑을 반대하는 세상 속에서 꺼지지 않던 생명력을 이어가던 사랑은 그렇게 지속된다. 다음 또 다음 사람들에게로.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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