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 피에타
무지는 증오를 낳는다. 강도(이정진)의 잔혹함을 읽는 방식이다.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돈을 빌린 사람들은 이자가 얼마나 늘었건 원금조차 상환할 능력이 없다. 그것을 알고 빌려주고 갚지 못한다고 팔다리를 자르는 게 사채 깡패 강도의 일처리 방식이다. 강도가 방문한 이들은 (강도가 밀어서) 고층건물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서지거나, 기계에 팔을 (강도가) 집어넣어 불구가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강도에게 시달릴 바에야 아예) 미리 자살을 하기도 한다. 뉴스에서 봤으면 한숨부터 나왔을 이런 처절한 현상들이 김기덕 감독의 열여덟 번째 영화 피에타에서는 일상처럼 흘러간다. 강도에 의해 팔다리를 잃고 평생 불구의 몸으로 적선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강도를 저주하고 단 하루도 잊지 않고 복수를 꿈꾼다. 어떤 이는 자기 어린 아들에게 매일 강도의 악마 같은 행적을 고발하며 살인자에 가까운 마인드로 학습시키기도 한다. 강도에게 이들은 세상에 대한 증오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갚지도 못할 돈 빌린 니들이 틀린 거다라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진 자들이 끄덕거릴만한 논리로 강도는 가난하고 능력 없어 재개발구역에서 쫓겨날 이들의 사지를 비틀어 놓는다. 강도는 인간을 다룰 줄 모른다. 강도가 저러는 건 인간을 인간이 아닌 돈 먹고 안 뱉는 닭 같은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생으로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고 삶아서 살점을 자신의 입에 넣는 닭.
그런 강도에게 엄마(조민수)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미안하단다. 용서해 달란다. 쫓아다닌다. 강도가 뒤흔들고 쌍욕을 해도 꿈쩍 않는다. 강도가 자신의 핏물이 뚝뚝 흐르는 살점을 먹이고, 네가 진짜 엄마면 내가 나온 곳으로 다시 들어가도 되겠냐며 머리 달린 어떤 짐승도 하지 않을 패륜을 범해도 엄마라는 여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본능적인 경련으로 반응할 뿐, 거부하지 않는다. 강도에게 내가 네 엄마다라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엄마를 겪어본 적 없어 엄마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강도는 그게 엄마인 줄 안다. 자기가 뭘 하든 용서하고 이해하고 안아주는 여자. 그게 엄마고 자신을 버린 혈육이며 이젠 다시 찾아와 자신의 곁에서 돌봐주고 함께해 줄 자신의 일부인 줄 안다. 그래서 천장에 머리가 닿을듯한 덩치를 가지고 자신과 같은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고, 엄마라는 여자가 조금이라도 성을 내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되물으며 조심스러워한다. 남의 남편, 남의 아들의 팔다리는 잘도 부서뜨려 놓았던 강도가 엄마라는 여자 앞에서는 강아지가 된다. 밤마다 몸부림치며 사정을 했던 바스러질 듯한 나약했던 심신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엄마라는 여자는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하며 때론 의아한 지시를 하며 강도를 길들인다. 강도가 생전 어떤 여자의 명령에 순종했을까. 강도는 그녀에게 순종한다. 단지 그녀가 내가 엄마야 라고 말했단 이유만으로.
엄마라는 여자가 뜨는 스웨터는 강도의 사이즈가 아니다. 강도에게 뜬금없이 나무를 갖다 심으라는 것도 의문이다. 엄마라는 여자는 언젠가부터 엄마라는 존재를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강도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인질로 삼아 그를 조종하기 시작한다. 엄마라는 여자가 보이고 말하는 모든 것은 강도에게는 모두 엄마라는 이미지가 주는 첫 경험이라서, 학습되지 않은 강도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르고 뒤흔드는 대로 흔들린다. 엄마라는 여자가 엄마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조차 그는 진실을 부정하는 행동을 보인다. 강도가 과거에 저지른 죄악이었다. 그 죄악에 의해 죽음을 택한 남자의 어미였다. 자식을 잃은 여자였고 사랑하는 인간을 잃은 인간이었다. 그녀가 사랑을 흉기 삼아 강도의 심장을 부드럽게 도려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도는 그것에 아파할 줄 조차 모른다. 그것은 마치 그냥 신체적 본능적 반응 같았다. 처음 만난 여자가 나타나 엄마라고 주장하고 엄마라고 여겨지는 행동과 말로 자신을 다루고 그래서 자신의 눈꺼풀에 씌워있던 세상의 지옥을 다 걷어갔다고 생각할 즈음 자신이 누군가를 떠밀었던 곳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죽은 모습을 본 후에도 강도는 여전히 여자의 자식처럼 군다. 여자는 죽음으로 자신의 복수를 완성했고, 강도는 아들이라는 거짓을 끝내 인정하지 못함으로써 그 복수에 완전무결함을 더해주었다. 강도는 남자의 시체에서 벗겨낸 팔이 짧은 스웨터를 입고 시체가 된 여자를 엄마처럼 끌어안는다. 그리고 회개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학습한 짐승은 자신이 죽도록 물어뜯은 인간들을 찾아가 피로 회개한다. 붉은 피로 그들의 길을 닦아준다.
개인적으로 김기덕을 대표했던 영화는 나쁜 남자였다. 그 외 그의 다른 영화들은 대부분 하나의 센세이션으로만 잔상이 남아있다. 이젠 더 이상 김기덕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피에타는 김기덕이 아닌 베를린 영화제 대상 작품으로 보였다. 그걸 지울래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피에타는 견딜 수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섬뜩하고 정교해 보였다. 베를린 대상 후광효과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아니었다면 피에타는 메시지는 비장하지만 대중성은 미약한 영화 정도의 평가로만 그쳤을 테다, 늘 그랬듯. 영화 피에타의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는 너무도 선명하다. 돈. 없으면 팔다리를 절단해 갚아야 하고, 있으면 남의 팔다리를 자를 수 있는 권한을 지닌다. 평생 한 곳에서 살았으면서도 권리를 돈에 의해 박탈당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돈 없는 남자들은 노모 앞에서 속절없이 죽어간다. 초라한 몸뚱이를 지닌 노파의 분노와 눈물들만이 재개발을 앞둔 판자촌의 정서를 구슬프고도 섬뜩하게 대변한다. 돈이 아들 잃은 엄마를 만들고, 아들 버린 여자라고 거짓말하게 하고, 다시 너에게 잘해줄게라고 죽음의 주문을 읊조리게 한다. 잃어버린 세월 돌려줄게 환청을 들리게 만든다. 로렐라이 절벽의 노랫소리처럼 뿌리치지 못해 기어이 손을 잡았고 그대로 죽음의 구덩이로 스스로 묻히게 만들었다. 다큐와 극 영화의 경계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명징한 헤드라인을 남긴다. 모두가 읽고 체험하고 더럽혀졌기에 불편하지만 결코 부정하지 못하는 진실을 적나라한 화법으로 드러낸다. 가장 지독한 슬픔과 가장 뜨거운 열망, 너희가 그토록 사랑하는 돈이라는 엄마가 너희를 가장 고통 속으로 빠뜨릴 거라고. 돈을 엄마보다 더 숭배하는 동네가 대한민국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