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발렌타인, 연애의 허상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 블루 발렌타인

by 백승권

젊은 남과 여, 첫눈에 반할 수 있다.


그곳이 요양원이든, 남자가 이삿짐센터 직원이든, 여자가 피곤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돌보고 있든 별로 상관없다. 젊고, 나이가 비슷하고,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남녀는 그래 우리는 이제 첫눈에 반한 사이야라고 서로에게 전파를 보낸다. 첫눈에 반한 이상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여자(미셸 윌리엄스)의 전 남친이 잠자리 매너가 안 좋아 사이가 벌어졌다면 더더욱 다행이다. 새로운 관계를 위한 쉬운 변명이자 동기가 될 수 있으니까. 남자(라이언 고슬링)의 생은 목적이 없다. 순간을 위해 그냥 눈앞을 위해 당장을 위해 무슨 일이든 상관없고 굶거나 크게 불편하지만 않으면 된다.


첫눈에 반한 남과 여는 서로의 영역으로 돌진한다. 밤 깊은 거리에서 남자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여자는 그에 맞춰 어설픈 춤을 춘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세상에 둘 밖에 없다는 듯 웃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헝클어뜨리고 몸과 마음을 섞는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다 그렇듯, 둘 역시 사랑에 미친 사람들처럼 사랑을 흩뿌린다.


위기는 결혼으로 이어진다. 위기는 여자의 임신이었고 위기였던 이유는 아기의 아빠가 남자가 아니어서였다. 여자는 중절을 하기 위해 남자와 함께 병원을 찾지만 차가운 의료기기가 몸속으로 들어오기 직전 생각을 바꾼다. 남자는 끌어안는다. 여자만 괜찮다면 여자의 아이도 여자처럼 사랑할 수 있었다.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었고 이 말은 즉 여자 아이의 아빠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둘은 위기를 결혼으로 극복한다. 둘은 깊고 오래 끌어안으며 서로를 보듬는다. 서로의 신경이 이어진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정지된 형태로 하나의 모습을 이룬다.


보통 사람들이 연애기와 결혼기를 나누는 이유를 개인적으로 제대로 납득하기 힘들지만 영화에서는 어찌 되었든 시간대를 교차시키는 방식을 통해 둘의 연애기와 결혼기를 분류하고 비교하기를 유도한다. 지금까지 말한 부분은 첫눈에 반한 남과 여가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였고 다음부터 말할 부분은 결혼 후 5년 정도가 지난, 현재 시점의 이야기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여자는 임신과 결혼으로 인해 목표를 재설정한다. 그녀는 현재 간호사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과거와 다르다. 생활에 찌든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긴 그늘을 드리운다. 모든 연인들이 결혼에 이르고 5년이 지난다고 다 저런 얼굴로 변모하진 않겠지만 밤새 쉴 새 없이 남자를 바라보며 눈과 귀로 곡선을 그리던 여자의 사랑스러운 표정은 증발했다. 마치 고온의 사막 위에 뿌려진 물처럼 바싹 말라 건조하기 그지없다.


딸아이는 곱게 컸다. 왜 이런 엉뚱한 표현이 나왔는지 알 길 없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다'라는 말이 절로 연상될 정도다. 남자는 딸과 잘 놀아준다. 좋게 말하면 딸의 눈높이로 놀아주고 다르게 말하면 딸 정도의 정신연령을 지닌 듯 철없는 태도로 놀아준다.


남자는 아빠와 남편이 되었음에도 변함없다. 세련되게 빗어 넘기던 긴 머리에서 조금 벗어진 머리가 세월을 말해준다. 시종일관 쓰고 있는 선글라스가 여유를 말해준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티셔츠, 아침부터 취해 있는 모습, 손에서 놓지 않는 담배는 아내와 엄마가 된 여자를 지치게 한다.


애가 어른의 말을 이해하고 뛰어다닐 정도의 나이가 되는 동안 남과 여는 연인에서 부부와 부모가 되었다. 그 사이 아끼며 기르던 개가 죽었고 개의 죽음은 두 부부의 눈에 진한 흐느낌을 쏟아내게 할 만한 위기와 슬픔의 상징이 된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죽은 개는 연애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남녀관계의 현재를 보여준다.


둘은 이른 아침부터 개의 행방을 묻는 딸아이를 처가에 맡기고 기분전환을 위해 우주선 콘셉트의 모텔방을 잡는다. 사랑을 나누며 듣던 음악을 틀고 술을 만들고 같이 샤워를 하고 흥청망청 취하다 바닥에 눕고 뒹굴고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의 서로를 이야기하고 과거의 장면들을 테이블 위의 술잔 사이에 꺼내어 놓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남자는 변하지 않았고 여자는 변화를 원했다. 남자의 꿈은 아빠와 남편이 아니었지만 세월은 남자의 꿈을 아빠와 남편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럼에도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일거리를 구하고 아침부터 술과 담배에 파묻혀 있고 종종 딸아이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놀아줄 뿐이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여자는 더 나은 기회를 제안받고 우연히 들른 마트에 전 남친과 짧게 재회하며 자신의 현재를 점검한다. 그리고 욱하기 좋아하고 상건달 같은 남편, 자신이 미치도록 사랑 '했었던' 남자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이는 여자를 지켜본 주변인들의 의견과도 상통하는 부분이었다.


술잔을 나누고 여자는 병원에서 급한 연락을 받고 남자보다 먼저 방을 나선다. 늦게 깬 남자가 화를 내며 여자를 찾지만 여자는 없다. 남자는 기가 막힌다. 자기가 애써 마련한 관계 회복의 기회를 여자가 무참히 날렸다고 생각한다. 자신보다 먼저 방을 비움으로써 자신을 실패자로 만들었다고 여긴다. 남자의 분노는 여자의 직장을 부수고 여자의 동료를 부수고 관계를 부숴버린다.


더 이상 뭐가 남았을까? 영화는 충분히 말해주지 않는다. 결혼 즈음과 현재 사이의 5년여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여자의 짜증 섞인 표정과 지친 말투로만 짐작하게 할 뿐. 그게 이별의 이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자는 남자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와 아이를 사랑한다 말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변화를 원했지만 한계를 확인했고 진절머리를 치기에까지 이른다.


둘은 첫눈에 반했었다.

지금은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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