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램지 감독. 케빈에 대하여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일까?
엄마는 남자에게 누굴까?
엄마는 아들에게 여자일까?
엄마는,
엄마라는 여자는
엄마라는 인간은
아들에게
남자에게
소년에게 누구일까?
어떤 존재일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축제의 흥에 겨워
남자와 밤을 보낼 때
이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어
라는 생각을 하는지
난,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와 관련된 통계자료가 있는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녀 에바(틸다 스윈튼)는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을 원하지 않았다고.
난자가 정자와 만나 생명의 씨앗을 만들고
에바의 뱃속에서 자라며 성별을 갖기 전부터
에바는. 아이가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었다고,
에바의 불안한 눈빛은 턱선은 뺨은 짧은 머리칼은
말하고 있었다.
에바 나는 케빈 너를 만날 준비를 하지 않았어
에바 내 계획에 케빈 너라는 목록은 적혀 있지 않았어
계획 없던 임신이었다.
만나기 싫었다기보다는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아들 케빈이 엄마 에바를 째려볼 눈이 형성되기 전부터
아들 케빈이 엄마 에바를 비아냥 거릴 입술이 붉은색을 띠기 전부터
아들 케빈이 엄마 에바를 겨누던 화살이 화살인지 활인지 알기 전부터
아들 케빈이 엄마 에바에게 증오와 적대적인 선을 긋기 훨씬 전부터
아들 케빈은 엄마 에바에게 거부당하고 있었다.
아들 케빈이 인간이라 불릴 만한 형태로 몸뚱이를 갖추고 그 안에 피가 돌고
뇌가 커지고 심장이 부풀고 마음이 형성되기 전부터
아들 케빈은 엄마 에바에게 불편한 장애물,
불편한 장애물이 될 것만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아들이 엄마를 엄마로 인식하기 전부터
엄마는 아들을 장애물로 인식했다는 것이
엄마와 아들의 비뚤어진 관계에 있어서
에바와 케빈의 뒤틀어진 관계에 있어서
잘못 끼워진 첫 번째 원죄, 첫 번째 단추였다.
그래서 에바는
아들 케빈의 엄마 역할을 맡았다는 직업적 소명보다는
죄책감에 의해 케빈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들 케빈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들 케빈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죄책감에 대한 보상으로
아들 케빈을 포기하지 않고
아들 케빈을 견디려 했을 것이다.
아마 케빈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지
내내 납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그를 바로 잡으려 했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미워한 건 케빈이 아니라 자신이었으니까.
엄마와 아들
에바와 케빈은 평행선 같은 관계를 지독하리만큼 꾸준히 견지한다.
도저히 하나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에바가 아무리 다가서려 해도
케빈의 자기장 안으로 에바는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다.
에바를 향한 케빈의 열기가 그녀의 살갗을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에바가 아끼는 것을 케빈은 열정적으로 무너뜨린다.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녀의 인내를 시험한다.
마치 영화 오멘에서 인간의 몸을 통해 태어난
악마의 자식이 주변의 인간들을 몰살시키려는 듯이
케빈은 에바의 인생을 파괴시키려 든다.
패턴이 뻔한 멍청이 같은 아빠와
순진해 빠진 강아지 같은 여동생 사이에서
케빈의 악마성은 은밀하고도 소스라치도록
그의 내면에서 뿌리를 내린다.
아비의 성탄절 선물로
학교 아이들의 몸통을 피로 물 들일 때
케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엄마라는 세상에 대한
복수의 끝이자 화려한 선물이라고 여겼을까?
케빈은 그저 세상에 널리고 흔해 빠진 말 안 듣는 아들에 대한
할리우드적인 답변 보고서일까?
엄마와 아들의 좁혀지지 않은 간극에 대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교훈적인 함의를 지닌
강렬하고도 신경질적인 심리드라마?
에바의 몸을 뚫고 세상을 향해 기어 나온 케빈은
에바의 자궁 안에서부터 에바의 불안을 듬뿍 세뇌받고 나왔고
그때부터 이미 케빈의 DNA에는 에바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새겨져 있었으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미 에바에 대한 깊고도 어두운 적대의식이
그의 피와 살과 함께 같이 자라고 있었다.
자신의 시작점이자 보호자이자 경쟁자인
에바와 만나는 순간부터
케빈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그녀에게서 찾아야 했고
그녀에게서 발견한 건 불안이었으며
결국 자신이 확신이 아닌
그저 쾡한 눈으로 넋을 놓는 여자의 하룻밤 실수에 의해서
태어난 것임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낳고
죄가 죄를 낳고
불안이 불안을 낳았으며
불안은 다른 불안을 덮기 위해 더 큰 불안으로 보복했다.
케빈은 에바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해
그녀 주변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고
그녀 주변의 생명을 토벌했으며
자신마저 그녀의 눈 앞에서 사라지게 했다.
자신마저 복수의 도구로 삼아버렸으며
이후 에바의 삶을 보았을 때
그 전략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느리고 조심스러운 대화
무겁고 나직한 질문
그리고 떨리는 대답.
케빈은 자신을 세상과 고립시킴으로써
에바 역시 세상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에바의 체온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자신의 존재 역시 흐릿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케빈의 생을 내내 지탱했던
분노와 증오의 토양분이
모두 엄마 에바에게서 시작된 것이었고
엄마 에바가 있어 가능했으며
엄마 에바가 없다면 자신의 존재 이유조차 불분명한
마치 탯줄이 끊어졌을 때 잠재되었을 법한
단절에 대한 두려움을
이제야 느낀 듯 상기된 표정을 짓고야 만 것이다.
이것은 이해일까?
이것은 화해일까?
증오의 끝일까?
용서일까?
엄마인 에바는 여자를 넘은 누구의 상징이라도 가능하고
아들인 케빈은 소년을 넘은 누구의 상징이라도 가능하다.
대화로 풀리지 않는 모자의 갈등과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대의 갈등이
적나라하고도 잔혹하게 드러난 영화
우리는 아직 케빈을 모른다.
케빈에 대하여 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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