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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pr 12. 2018

너는 여기에 없었다, 자살 환상

린 램지 감독. 너는 여기에 없었다






한 번의 삶 동안 한 사람은 여러 번 죽는다. 살인 용역 조(호아킨 피닉스)도 그랬다. 깨지 않는 악몽 같은 소년기, 망치를 휘두르며 온 가족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를 피한 옷장에서 비닐에 목을 감아 질식사를 시도한다. 평생 반복한다. 죽기 직전의 공포와 떨림만이 익숙해진 위안이었다. 죽음의 문턱 앞에 다다라서야 얻을 수 있는 비참한 평화였다. 어느덧, 덩치는 커지고 수염은 자라고 눈빛은 피폐해졌다. 함께 살아남은 엄마와 농담을 나눈다. 일이 들어왔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쓰레기 여럿을 죽여야 한다.

왜 소녀일까. 소년이었다면 조는 아마 당장에 죽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떠올리며 과거를 압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예카테리나 삼소노프)는 성착취 목적으로 납치되었고 구한 후에는 의뢰인이 살해된다. 조가 그렇듯 소녀도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관련된 모두가 살해되고 있었다. 조의 친구, 협력자, 엄마까지 모두 죽는다. 그나마 희미하던 조의 세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조는 엄마를 죽인 자에게 물을 먹이고 말을 걸고 손을 잡아준다. 그의 몸은 이미 조가 쏜 총에 맞아 온통 피에 잠기고 있었다. 조는 엄마 살해자를 고문하지 않는다. 엄마는 조가 주지 못했던 안식을 얻었던 걸까. 조는 엄마를 수장하며 자신의 주머니에 돌을 담아 같이 익사한다. 시도한다. 그리고 소녀를 떠올린다. 떠오른다. 조는 당장 죽을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소녀와 밥을 먹으며 앞으로 행선지를 묻는다. 정해졌을 리 없다. 둘 다 몰랐다. 소녀는 자리를 비우고 조는 소녀가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조의 총구가 망설임 없이 턱밑을 향한다. 조의 머리가 박살나며 사방에 피와 살점이 튄다. 소녀가 돌아온다. 환상, 조는 처박은 머리를 천천히 든다. 조가 소녀를 다시 구하러 갔을 당시 소녀는 자신을 범하려던 자의 목을 거칠고 날카롭게 그었다. 그런 소녀는 조와 닮아 있었다. 새로운 폭력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짐승의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둘은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의 머리통을 부수고 목을 그었다. 앞으로 더 그래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아버지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다. 더 이상 조는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의 천사가 이미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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