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Apr 18. 2018

팬텀 스레드, 죽일만큼 사랑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팬텀 스레드





어떤 사랑은 '발견'된다. 처음엔 그게 사람인지 사랑인지 모른다. 완벽한 피사체. 내가 만드는 옷을 가장 돋보이게 해줄 체온을 지닌 마네킹. 늘 깨어있고 나의 예술가적 예민함을 존중해주고 몰입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사람. 내 오랜 누나 샐리(레슬리 맨빌)같은 사람. 조금 넓은 어깨와 마른 가슴, 나온 배. 화장기 없는 입술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 시녀 같아야 하고 스텝 같아야 하며 엄마 같아야 하는 사람. 패션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큰 키에 흰머리가 잘 어울리는 세련된 태도의 소유자였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응석을 받아주고 챙겨줘야 하는 아기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알마(빅키 크리엡스)는 느닷없이 그 앞에 나타났고 둘의 목적이 다른 탐닉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존감이 약했던 알마는 레이놀즈의 옷을 입으며 새로운 세계에 눈뜬다. 자신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그렇게 만들어준 남자에게 무한의 애정을 느낀다. 둘은 손을 잡고 걷고 새벽에 새 옷의 디자인을 검토하며 충동이 서로를 덮칠 땐 깊은 방으로 들어가 두 개의 문을 닫는다. 알마에겐 사랑이었고 레이놀즈에겐 아니었다. 레이놀즈는 자신의 감정의 상대의 언어로 표현할 줄 몰랐다. 스스로가 강하다고 믿는만큼 연약했고 예민했으며 당연하다고 믿었다. 알마는 그의 완벽한 세계에 일어난 벼락과 같은 균열이었고 레이놀즈는 본능적으로 밀어내려지만 늦었다. 알마는 독을 준비한다. 알마에겐 그게 레이놀즈를 위한 사랑이었다. 쓰러진 레이놀즈는 알마에게 기댄다. 청혼한다.

둘은 닮아간다. 옷을 향한 과열된 애정을 분출한다. 레이놀즈가 혼신을 다해 만든 옷이 돼먹지 못한 이에게 입혀져 마구 구겨지고 업신여겨질 때 둘은 참지 못한다. 다시 벗겨내고 달아난다. 서로의 입술을 포갠다. 그리고 다시 멀어진다. 변하지 않는 원본의 각자가 충돌하고 있었다. 날과 날이 강하게 부딪쳤고 한쪽이 깨지지 않는 이상 영영 부딪칠 것 같았다. 알마는 다시 독을 요리하고 그제서야 레이놀즈는 알마가 자신을 어떻게 길들이려 했는지 알아챈다. 아랑곳없이 아내의 음식을 보란 듯이 삼킨다. 자신이 싫어한 방식으로 조리되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위험한 버섯을 위험한 의도를 위험한 사랑을 받아들인다. 고백한다. 사랑한다고.

알마는 레이놀즈가 죽더라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죽어서도 우린 함께할 거라고. 돌아온 레이놀즈는 엄마의 망령과 연계되었던, 스스로를 악몽에 속박시켰던 저주로부터 벗어난다. 사랑의 실현, 여전히 식기가 부딪치는 식탁의 소음은 힘들었지만 감내한다. 자신의 감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디자인한다. 알마는 자신, 어머니, 누나,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었고 그래서 자신에게 완벽한 사랑이자 사람일 수 있었다.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게 만드는 사람, 그로 인해 변화를 끌어오는 존재, 비인간적인 과거를 깨고 과감할 정도의 투박한 인간미를 전하는 사랑. 알마는 영원한 덫이었다. 고통스러우나 영영 벗어나고 싶지 않은 구속. 새벽에 깬 둘은 다시 옷을 만든다. 결함과 결함이 만나 궁극의 핏으로 완성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여기에 없었다, 자살 환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