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범 감독. 무산일기
탈북자들을 향한 분리된 시선이 있다. 이것은 마치 뉴스에 나오는 파업 노동자들이나 재개발 지역의 판자촌 거주자들을 향한 시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국적의 사람이지만 나와 환경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은 나와 '다르다고' 여겼다. 그들의 분노에 동조하거나 SNS로나마 힘을 보태거나 아주 어려운 상황에 공감될 때는 아주 조금의 돈을 보내거나 등의 행동은 했지만 그들과 나는 달랐다고 여겼다. 지금껏 살아내 온 방식도, 가지고 있는 생각도, 다만 살고 싶다는 생존 욕구에만 깊은 공감을 느꼈을 뿐이다. 이기적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다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분향소와 크레인을 찾아 응원할 만큼 마음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르다고 여겼다.
남한에 같이 거주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이런데, 탈북자들에겐 오죽할까. 생존을 위해 목숨 걸고 경계를 넘어온 북한 사람. 탈북자에 대한 정의는 이게 다였다. 초등학교 때 조금 읽어본 광수의 일기가 탈북자에 대한 가장 구체적 기억이었다. 수십 명이 한 번에 넘어온 가족의 사진들, 중국대사관 벽을 넘으려 사력을 다해 달리는 장면들, 익숙해진 이름의 북한 고위직/지식인 탈북자들, 그리고 경계에서 매춘과 마약 등 힘겹게 지낸다는 소식들, 방송을 통해 보고 들은 게 탈북자들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통일이 된다면 하나의 국적을 가질 북한에서 넘어왔지만, 전시상황으로 보면 적국에서 넘어왔다는 인식도 가능한 사람들, 영화와 TV를 통해 등장하지만 미심쩍은 기분을 다 씻어낼 수 없는 국경 너머에 살던 사람들, 이게 탈북자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였다.
영화 무산일기는, 렌즈를 좀 더 가까이 들이댄다. 남에서 북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장면에 대한 스펙터클한 연출이 아닌, 넘어온 이후, 먹고살고 자는 생활의 문제에 봉착한 그들의 하루하루를 포착한다. 주연이자 감독을 맡은 박정범의 친구이기도 했다는 승철을 중심으로 세밀하고 그려나간다. '따뜻한 나라'남한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늘하고 낯설게 지내고 있는지, 커다란 중심 사건 없이 승철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놀라운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귀밑을 넘어 목덜미까지 수북이 덮는 머리, 구겨지고 어깨가 맞지 않는 겉옷, 웃는 법을 잊은 듯, 아니 배우지 못한 듯 주눅 든 표정, 초라한 인상착의를 지닌 승철은 남한으로 온 지 1년 남짓되는 탈북자다. 그는 같은 탈북자인 친구 경철과 같이 살고 있고, 그에게 종종 옷을 빌려 입으며 신세를 지고 있다. 그는 월급과 4대 보험이 보장되는'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커다랗게 프린트된 포스터 뭉치를 둘둘 말아 어깨에 지고 다니며 곳곳에 청테이프로 붙이고 다니며 하루하루 돈을 받고 지낸다.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맨날 욕을 먹고, 그만두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그의 유일한 휴식은 등 하나 켜둔 어두운 방 안에서 찬송가를 틀어놓고 성경을 넘기는 시간. 신은 그에게 선택이 아닌 마지막 희망처럼 보인다.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그는 박스에 담겨 팔리기만을 기다리는 강아지와 나눠 먹는다. 그는 강아지를 데려오고, 자신의 친구로 삼는다. 누구도 탈북자와 친구가 도리어 하지 않는 남한의 변두리에서, 강아지는 자신이 투사된 연약한 짐승이자, 분신이었다. 거친 욕설과 폭력에 시달리고 사람들 앞에 서기 두려워하는 그지만 강아지와의 말없는 교감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동네 교회를 다니면서 한 여자에게 마음이 동한다. 그녀에게 다가서려 하지만 쉽지 않고 전단지 붙이는 일도 잘린 상황에서 생계를 위해 그는 여자가 운영하는 노래방에 취직한다. 성실하게 일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경계하고 같은 교회에 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척 말아주길 바란다. 승철은 욕심이 없다. 그는 그렇게 한다.
자신을 챙겨주는 형사를 따라 어렵게 발걸음 한 교회 소모임, 승철은 자신이 북한에서 친구를 때려죽였음을 무겁게 고백한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과거를 속죄하고 마음속 짐을 덜어낸다. 승철을 오해하던 승철이 좋아하는 같은 교인이자 노래방 여주인은 이 고백으로 마음을 연다. 노래방 영업을 교인들에게 부끄러워했던 자신보다 승철의 용기 있는 고백을 높이 산다. 그렇게 둘은 조금 가까워진다. 돈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있던, 그리고 자신을 필요할 때만 친구라 불렀던 경철과 연을 끊고 승철은 머리를 자른다.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다시 일을 시작한다. 승철이 남한에 넘어와 처음으로, 안정과 정착, 참여와 친구라는 단어와 살갗으로 가까워지고 있을 즈음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강아지가 죽는다. 유일했던 지난날의 친구가 숨을 거둔다. 차가운 길가, 멍하니 서 있는 승철의 실루엣이 오랫동안 화면에 드리운다. 이별.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탈북자 승철은 죽고 남한 사내 승철의 탄생을 암시하는 걸까. 영화 내내 관객들에게 자신의 움츠린 모습을 보여주던 승철은 강아지의 죽음을 뒤로하고, 스크린에서 등을 돌린 채 뚜벅뚜벅 걸어간다. 앞으로. 앞으로.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해내며 시종일관 묵직한 몰입을 이끌어낸 박정범과 다큐를 보는 듯한 조연들의 살아있는 연기가 돋보였던 걸작, 무산일기. 영화는 말미 담담한 희망을 남겼지만, 남한이 그들을 그저 '탈북한 사람들'로 보는 이상 결코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메시지가 내내 읽혔다. 카메라 바깥의 상황들은 더 암담하고 더 비참하겠지. 단순한 동정의 시선으로 얼마나 많은 부분이 개선될 수 있을까? 생존과 직결된 그들의 경제력을 보장할 수 있을까? 마치 지금도 우리는 그들을 동남아에서 넘어온 외국인 노동자 취급하지 않나? 당장 통일이라도 되면 남한의 그나마 건재한 풍요와 여유를 위협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나?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때 교회가 그들을 품는 모습은 따뜻했다. 담이 낮은 그곳에서 탈북자들은 또 하나의 주의 자녀일 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일. 옆에 사는 이웃에게도 경계를 드리우는 (나를 포함한) 남한 도시민들도 그럴 수 있을까? 한 번에 따뜻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배격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백인이 아니고 그들은 흑인이 아니니까. 결국 우리나 그들이나 뭉쳐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심지어 같은 말을 쓰는) 소수 단일팀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