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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31. 2018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부르면 가야 하는 인생

이광국 감독.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대리기사의 삶은 퍽퍽하기 그지없다. 눈코입 키 목소리가 이진욱 이어도 별 수없다. 가지각색으로 지랄을 떠는 손님 새끼들은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시비 걸고 인사 안 한다고 시비 걸고 걱정한다고 시비 걸고 (무조건 현금인데) 카드단말기 없냐고 돈 안 내고 왜 멀쩡한 내 차에 기스냈냐고 뒤집어 씌우며 돈 안 내고 난리도 아니다. 컵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때우고 동거녀에게 쫓겨나고 신춘문예 낙선하고 전여친에게 들러붙을까 친구 놈한테 들러붙을까 고민 때리는 경유(이진욱)는 답이 없다. 안 보인다. 의지도 (물론 있겠지만 겉으로는) 없어 보인다. 뉴스에서는 호랑이가 탈출했단다. 알게 뭐야. 그냥 진상 손님 새끼들이나 다 물어 죽였으면. 


처음부터 안 풀린 건 아니겠지. 노인과 바다에 심취해 진로를 소설가로 정했다. 난 문학에 모든 걸 걸겠노라. 신춘문예로 가는 길은 좁다. 같이 준비한 여친만 붙었고 그렇게 전여친이 되었다. 먹고살아야 해서 대리기사를 뛰었고 그렇게 글과 멀어지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다. 글 안 써도 안 죽지만 대리운전은 안 하면 굶어 죽었다. 생의 앞길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손님들의 목적지로 달려야 했다. 경유라는 이름, 수많은 손님과 손님의 차들이 경유를 경유해갔다. 집 없고 돈 없는 경유의 이번 손님은 전여친이었다. 이보다 비굴할 수 없었겠지. 과거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했던 이에게 홀로 된 현재 누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큼의 비극은 없다. 셰익스피어가 뱀파이어였다면 아마 이런 상황을 많이 차기작에 녹였으리라. 경유와 유정(고현정)은 그렇게 다시 이어지려고 한다. 유정은 경유의 몸과 글을 동시에 탐하려 했다.


갈 곳 없고 외로워서 한침대는 쓰지만 둘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다. 유정은 경유의 과거 원고를 고쳐 출판사에 제출하고 싶었고 경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유정과 헤어진 후 잠시 함께 지냈던 현지(류현경)의 행방을 찾지만 그녀 역시 생계가 막막해 경유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듣고 비틀거려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경유가 자기 입에 풀칠조차 못하는 애라서 경유까지 먹여 살릴 힘이 없어 도망친 거였다. 경유는 번거로운 존재였다. 경유는 자신의 입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한심한 놈. 


시간이 흐른 들 갑자기 경유가 노벨 문학상 급 소설가가 될 일은 없었다. 차기작에 전전긍긍하던 유정의 신춘문예 당선작은 뒤늦게 표절 의혹에 휩싸였고 경유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까 봐 미친 듯 거꾸로 달려온 지점에서 방금까지 동승했었던 손님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세상모를 일, 경유도 이렇게 뻑뻑하고 갑자기 다이내믹하게 생이 휘몰아칠지 모르겠지. 다 힘들고 다 어려운데 경유는 자신도 그 정도로 힘들다는 걸 조금 늦게 늦게 깨닫고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다시 목격하게 된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와중에 타인의 생명을 구한 상황, 경유는 담배를 사러 들른 편의점에서 펜과 종이를 산다. 소설의 제목 같은 걸 표지에 끄적거린다. 경유는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까. 완성한 소설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소설은 경유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라고 답하고 싶지만 모를 일이다. 다만 경유에겐 이제 종착역이 필요하다. 욕은 퍼부어도 밥은 꼭 챙겨주는 착한 친구(서현우) 그만 괴롭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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