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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un 05. 2018

버닝, 너의 시체라도 발견했으면 좋겠어

이창동 감독. 버닝







갑자기 나타난 너와 피하지 않은 난 골목에서 담배를 폈어. 우리의 불은 아주 작았지. 우리가 태울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어. 거리에서 춤을 추며 손님을 모으는 너와 법정에 선 아버지 대신 소를 돌봐야 하는 나.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 가지고 태어난 게 없어서 지금도 가진 게 없었다. 넌 얼굴이라도 바꾸며 신분 상승을 꿈꿨지만 꿈은 꿈이었지. 감출 수 있는 건 없었어. 그래서 그 사람이 널 알아본 거야. 네가 숨기고 있던 두려움, 불안, 열등감을.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었지. 넌 잡혔고 난 그걸 바라만 봤어. 너를 좋아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그 사람은 포르쉐를 몰고 있었으니까. 강남 반포 고급 빌라에 살고 있었으니까. 넌 주술에 걸린 듯 빠져 들었지. 우리에게 없던 걸, 아니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걸 그 사람에게서 본 거야. 그 사람은 다 가진 것 같았거든. 마치 개츠비처럼 보이기도 했지. 하지만 그 사람은 오히려 개츠비가 동경하던 사람들과 더 비슷해 보였어. 개츠비 흉내를 내던 건 오히려 우리였지. 우리의 목적은 애초 태생부터 불행을 담보로 잡고 있었던 거야.


너의 공간에서 홀로 너를 떠올리며 자위를 했어. 한 줌의 햇볕이 겨우 들어오는 창문 앞에서. 너와 연인이라 생각한 적이 잠시 있었는데, 지금은 너희가 연인 같았지. 아니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여자아이와 그런 너를 비웃으며 동물원 원숭이처럼 가지고 노는 남자처럼 보였지. 그에겐 경계가 없었고 그런 모습이 내겐 경계였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갑자기 찾아와 석양 앞에서 헐벗은 채 춤을 추는 너를 난 견딜 수 없었어. 창녀 같았지. 그의 취미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거라고 했어. 그리고 이곳엔 비닐하우스 같은 여자가 많다고 했지. 태워도 아무도 모르는. 태생도 현재 지위도 불분명한 존재들. 내겐 죽여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고 그중에 네가 있으며 다음 죽일 사람은 아마 네가 될 거라는 섬뜩한 불안감이 닥쳤어. 하지만 내겐 널 지킬 방법이 없었지. 너는 사라졌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죽인 걸까. 널 태운 걸까. 나도 그처럼 되고 싶은 걸까. 소리샘으로 그만 연결하고 전화 좀 받아. 해미(전종서)야, 대체 어디 간 거니. 난(유아인) 애꿎은 트럭을 두고 굳이 몸으로 달려가며 너의 행방을 찾고 있어. 아마도 그가 널 죽인 흔적, 너의 시체라도 발견하고 싶다는 듯이.


그(스티븐 연)의 뒤를 쫓는다고 네가 나올까. 나는 정말 너를 쫓는 건지, 아님 그를 추종하려는 건지. 나는 소설이 쓰고 싶어. 문창과를 나왔잖아. 또라이 같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이토록 퍽퍽한 삶을 다른 버전으로 종이에 옮기고 싶어. 거짓말처럼 매력적인 게 또 없지. 현실과 진실이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자존심이야. 비굴해도 비굴하지 않은 척하는 것. 하지만 숨길 수 없지. 가진 게 없는 너와 난 아무것도 숨길 수 없어. 하지만 그는 너를 숨긴 거 같아. 너를 보여주지 않고 있어. 죽일 거야. 너는 어디에 있을까? 네가 어릴 적 떨어졌다는 우물? 그가 홀로 찾아갔던 저수지? 그는 끝내 네게 인도하지 못할 거 같아. 참을 수 없어. 아버지가 잘 갈아놓은 칼이 있어. 그를 죽일 거야. 내가 복수해줄게. 가질 수 없으니까 연기처럼 사라지게 할게. 그가 말한 너처럼. 연기처럼 사라지게 할 게. 모조리 태울게. 이렇게 한다고 물론 우리가 갖지 못한 화목한 가족, 많은 돈, 좋은 집, 스포츠카가 우리 것이 되진 않겠지. 하지만 그를 없앤다면 그의 소유도 더 이상 그에게 소용없어질 테니까. 공평한 거 아닐까. 만약에 네가 돌아오면 다시 시작하자. 그가 없던 처음처럼, 다시 담뱃불을 붙이자. 우리의 작은 불씨를 태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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