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습작

이용주 감독. 건축학개론

by 백승권

누구도 첫사랑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처음이란 게 다 그렇겠지만, 첫사랑만큼 강렬한 화인을 남기는 경험은 드물다. 그전까지 그런 눈동자를 본 적이 없고, 그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 없으며, 그런 걸음걸이를 본 적이 없고, 그런 행동에 눈이 간 적 없었다. 그런 사람을 만난 적 없으며, 그런 사람이 그렇게 오래 생각난 적도 없었으며, 그런 사람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적도 없었다.

세상의 중심이 그 사람이 되었고 내가 태어난 이유가 그 사람이 되었으며 마치 지금 이 순간까지의 모든 역사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인 것만 같다. 그 사람이 하는 말 어느 하나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사람이 하는 어느 행동 하나도 이유가 붙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 사람이 하는 어느 감정표현 하나하나가 진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사람은 화상처럼 피부 속 깊이 들어온 것 같더니 뜨겁게 허우적거릴 뿐 도저히 나갈 줄을 모른다. 그 사람은 근육주사처럼 마음속 깊은 어딘가를 뻐근하게 만들더니 도저히 불어나는 통증을 막을 길이 없다. 그 사람 주변의 이성은 3대를 멸족해도 모자랄 운명의 주적이 되고, 그 사람 주변의 장소는 고스란히 보존해두고 싶은 유적지가 되며, 그 사람 주변의 날씨는 내가 곁에 같이 있어줘야만 하는 절대적 이유가 된다.

그 사람을 깊이 생각하다 보니 처음부터 내 사람 같고, 내 사람 같다 보니 내 곁에 없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며, 이상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발전한다. 내가 그 사람을 깊이 좋아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꼭 날 좋아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잊는다. 모든 이성의 기능과 논리의 수립은 오직 자신 안에서만 합리화된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지 않으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까 그런 거다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코 앞에서는 말 한마디 열지 못하면서 밤에는 혼자서 천장을 보며 별을 센다. 코 앞에서는 밥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혼자서는 이미 데이트만 50번째다. 환상과 현실의 거리가 더 이상 좁혀지지 못할 때 첫사랑은 그저 이뤄질 수 없는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 마치 태고 적부터 내려오는 저주처럼 자신도 조상들의 소심한 유전자를 이어받아 마가 끼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혼자서 술 마시고 혼자서 담배 피우고 혼자서 시를 쓰면서 그렇게 혼자가 혼자를 위로한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아주 좋은 것들만 기억하려 애쓴다. 그 사람의 좋은 인상, 좋은 습관, 좋은 눈빛, 좋은 말투, 좋은 옷차림, 좋은 태도, 나와 함께 보낸 좋은 시간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첫사랑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게 아닐까? 처음에 겪은 강렬함, 환희, 아쉬움의 잔상들이 결국 그다음 경험으로 이어지고 복기되고 뭔가 만회하려 무의식 중에 시도되는 것은 아닌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는 첫사랑을 상징하는 기억 속 그녀와 현실 속 그녀가 등장한다. 기억 속 그녀(수지)가 완전무결한 존재로 시종일관 햇빛만 받으며 등장한다면 현실 속 그녀(한가인)는 어른들의 문제로 그늘과 한숨을 떠안은 채 자주 눈물짓는다.

남자(엄태웅)는 더 이상 소년(이제훈)이 아니고 여자도 더 이상 소녀로 돌아갈 수 없다. 현실은 다양한 외압을 통해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과거는 어떠한 수정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결국 누구도 첫사랑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건축학개론은 납득 가능한 가장 보통의 첫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카피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영화, 각자의 소설, 각자의 시 같은, 현세의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극적인 첫사랑 이야기가 있다. 내 첫사랑에 대해 짧게 노출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과 결혼했다.






연애의 허상 - 영화와 사랑에 대한 비밀과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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