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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Oct 30. 2018

파랑머리 앤

브런치 X 빨강머리 앤

*미용실에 도착하기 전 앤의 상상도









스각. 수많은 연습 후에야 앤은 손목을 그을 수 있었다. 붉은 피가 선처럼 배어 나왔다. 앤은 준비해둔 키친타월을 뽑아 상처를 덮었다. 쓰읍, 생각보다 아프네. 자칫 119를 부를 수 없는 비상사태까지 생길까 봐 앤이 선택한 대안은 손등 아래를 긋는 거였다. 아직 멀었어, 난. 아직 죽음의 흉내는커녕 근처에도 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아니 죽음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방문조차 찾지 못한 걸지도 몰라. 꼭 이래야 그들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걸까. 죽음을 경험해야 죽음을 결심한 자들의 심정에 도달할 수 있는 거야? 앤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상자를 뒤지고 후시딘을 발랐다. 일본어가 쓰여 있는 밴드를 까서 붙였다. 상처가 길어 한 개로 충분하지 않았다. 여러 개를 삐뚤삐둘 이어야 했고 붙이는 내내 따끔거렸다. 담배를 찾았다. 창문을 열고 벽에 기댔다. 담배연기가 원룸 안으로 스멀스멀 차올랐다. 아이코스 사고 싶다. 새로 나온 거 엄청 멋지던데. 앤은 풀린 눈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휴대폰을 꺼내 트위터를 열었다. 이번에도 자살 시도 실패. 죽음에 대한 연구는 그만둬야 할 듯. 11월의 스산한 바람이 열린 창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햇볕을 좀 더 쬐고 싶었지만 닫아야 했다. 앤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선풍기를 켜 남은 담배연기를 지웠다.


앤은 죽음에 근접한 자들에 대한 환상에 휩싸여 있었다. 환상은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환상에 익숙해질 수 있다면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이 바뀔 것 같았다. 수많은 영화와 그림, 글과 뉴스가 켜켜이 쌓여 앤의 현재를 만들었다면 설명하기 쉽겠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앤은 재밌는 과거가 많았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나눌 친구가 거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귀를 막은 건 아니지만 과거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앤은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마음 깊은 곳에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 1,2,3을 만들었다. 각 친구에게 주제를 할당해서 이야기를 듣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싶었지만 매번 다양한 감정이 순서 없이 친구 1,2,3을 소환했다. 앤은 외롭지 않았다. 다만 앤은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야기를 지닌 자의 숙명 같았다. 누군가 나만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줬으면 좋겠어. 언제라도 열쇠를 줄 수 있으니 어서 열어보라고. 내게 삶을 초월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이 부족한 걸까. 앤은 얼마 전 어느 케이블 종교 방송에서 한 설교를 듣게 된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고 있었고 그 고통의 경험을 통해 신과 만났으며 자신이 구원의 소명을 얻었다고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내겐 아직 죽음의 분위기가 없구나. 내게 깊고 어두운 죽음의 분위기가 느껴질 때 비로소 내 이야기의 청중이 생기겠구나. 앤은 과거에 본 영화들 중 욕조에 퍼지는 피의 이미지를 좋아했다. 아름답고 슬프다고 생각했다.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근사한 장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키친 타올로 감은 손목이었다. 이 정도로 이렇게 아프다니, 죽음은 역시 쉽지 않군. 앤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브런치에 들어갔다.


빨강머리 앤 이야기? 난 흑발인데. 나도 지원할 수 있는 건가. 앤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거울 앞에 앉았다. 하얀 피부, 검정 커트 머리, 시종일관 무표정인 얼굴, 목이 늘어난 회색 줄무니 티셔츠와 피카추가 그려진 5천 원짜리 하늘색 마약 잠옷 바지. 뭔가 드라마틱한 요소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죽을 수 없다면... 그에 버금가는 강렬한 변화가 필요한데. 마감일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책을 낼 기회를 주는구나. 일러스트는 내 영역이 아니고. 작가로 참여하면 원고료를 주는 거겠지. 이름을 조금 알려서 다른 일거리가 들어올 수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쓸 기회를 얻을지도 몰라. 굳이 죽음에 가까이 가지 않아도 난 청중이 생기는 거야. 끌린다. 하지만 무작정 뭘 쓸 수 있지? 나와 빨강머리 앤은 아무것도 닮아 있지 않은데? 심지어 난 머리색도 까맣다고.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망울이 달린 것도 아니라서 뭔가 너무 아쉽다. 동기가 필요했다. 아니 동력, 이야기를 밀어낼 연료가 있어야 했다. 앤은 인터넷 뱅킹의 잔고를 확인했다. 45만 원. 월급날은 조금 남았지만 이 정도면 염색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앤은 미용실 전단지를 찾아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래, 나도 이제 앤이 되는 거야.


마침 예약 손님 한분이 캔슬하셔서 지금 오시면 바로 하실 수 있어요. 미용실로 향하는 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빨강머리라니. 그런데 만화 속 빨강머리 앤은 날 때부터 빨강머리였나. 와 갓난아이가 흰 피부에 빨강머리로 울부짖었던 거야? 생각만 해도 뭔가 그로테스크한데? 앤은 자신이 빨강머리로 바꾼다는 사실보다 이런 결정을 했다는 점에 더 흥미를 느꼈다. 마음 깊은 곳의 친구 1,2,3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통장 잔고가 아슬아슬한 것도 맘에 들었다. 뭔가 세상 모든 요소가 앤을 빨강머리로 바꿔주기 위해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쉬고 싶어 연차를 냈고 막상 연차를 냈지만 약속이 없었다. 뒹굴다가 자살을 시도했고 -물론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글을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 난 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으니까. 빨강머리 앤에 대해 쓰기 위해 빨강머리로 바꾸기로 하다니. 앤은 이런 자신의 새로운 시도 자체가 재미있었다.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 보일까. 어차피 빨강 컬러렌즈를 끼는 것도 아니니 세상의 자연색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내 몸의 가장 길고 풍성한 털의 색을 바꾸는 거니까, 적어도 그만큼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세상이 내게 관심을 갖고 난 더 많은 관심을 위해 끝내주는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 이야기를 빨강머리 앤으로 위장해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난 이제 빨강머리 앤이 되는 거야. 머리색만 바꾸는 게 아니야. 머리색부터 발끝 색까지 모조리 바꾸는 거라고.


똑똑. 왜 미용실 유리문에 노크를 한 걸까. 스르르륵. 유리문은 두 번째 노크를 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열렸다. 예약을 확인하고 가운을 입고 설명을 듣고 머리를 감았다. 물 온도 괜찮으세요? 더 헹구고 싶은 곳 있으세요? 앤은 안내를 받고 배정된 의자에 앉았다. 밝은 조명 아래 촉촉한 얼굴과 머릿결이 눈 앞의 거울을 채웠다. 도망쳐. 친구 1이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앤,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친 거 아냐? 빨강머리라니, 네가 제5원소의 밀라 요보비치인 줄 알아? 그 여자는 슈퍼모델이라고. 어서 거기서 나와! 친구 2와 3이 가세해서 머릿속을 채웠다. 앤은 속이 메슥거렸다. 현기증을 느꼈다. 손님 괜찮으세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커피 오렌지 주스 아이스티 있는데. 저... 아이스티 주세요. 네, 곧 가져다 드릴게요. 야 지금이야 어서 튀어 나가. 아직 결제 안 했지? 귀가 먹먹했다. 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앤 집중해. 넌 새로운 이야기의 위대한 시작점에 있다고. 널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넌 지금 너의 과거와 보수적 사고방식과 싸우고 있는 거야. 그냥 밀어붙여. 넌 빨강머리에 대해 획기적인 방식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에 서 있는 거라니까. 앤과 앤과 앤과 앤이 다투고 있었다. 아이스티가 도착했을 때 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앤은 가운을 걸친 채로 거리로 빠져나왔다.


아, 뭔가를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머리색 하나 못 바꾸면서 무슨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다리를 건너는 동안 앤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을 햇볕이 따가웠다. 눈을 못 뜨겠네. 앤은 순간 얼마 전 유행했던 사진 앱을 떠올렸다. 여러 액세서리로 꾸며주거나 인형 캐릭터로 바꿔주거나 다양한 메이크업과 스타일링으로 다양한 셀피를 찍게 해주는 앱이었다. 빨강머리가 있으려나. 앤은 다리 위에 서서 한참을 뒤적거렸다. 햇볕은 점점 꺼져가고 휴대폰 화면은 점점 밝아졌다. 해가 다 지기 전에 찾아야 할 텐데. 빨강머리는 그 앱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욕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앤은 안도하기로 했다. 파랑머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래 이걸로 가자. 파랑머리가 화면 위에 올려지자 앤의 하얀 피부는 더 도드라졌다. 평소보다 눈도 더 까맣게 보이고 입술도 좀 더 진하게 느껴졌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앤은 해가 넘어가 더 이상 얼굴이 인식되지 않을 때까지 셀피를 찍었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그래, 시작하자. 앤은 카톡 닉네임을 파랑머리 앤으로 고치고 플픽을 방금 찍은 사진들 중 가장 맘에 드는 걸로 바꿨다.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이야기의 첫 단어를 썼다. 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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