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계속된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 유스

by 백승권



*스포일러



나는 어떤 사람. 누구나 자신을 정의한다. 정의는 오랜 시간 걸려 축조되기도 한다. 개인의 성취와 공공의 반응이 섞인다.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 그리고 다른 기억으로 정의는 완료된다. 어느 순간 완료된 정의가 오래 따라다닌다. 음악과 영화의 거장들, 프레드(마이클 케인)와 믹(하이 케이틀)은 대중들에게 오랜 시간 칭송되고 정의된다. 자신들 역시 이런 정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는 깨어지기 쉽지 않다. 당사자들 역시 그 정의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둘은 막역한 친구고 한 호텔에 묵는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도착한 사람들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벌거벗는 곳, 프레드와 믹은 그곳에서 자신의 가면과 마주한다.


전설적인 작곡가 겸 지휘자와 세계적인 걸작을 남긴 영화감독. 둘에겐 성공한 커리어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다. 나날이 쇠락해져 가는 육체와 함께 모든 것에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나이이지만, 둘의 욕망은 남아있고 살아있다. 다만 실행의 여부를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프레드가 비서인 딸 레나(레이첼 와이즈)와 갈등하고, 믹이 주연 캐스팅 문제로 브렌다(제인 폰다)와 논쟁하면서 둘은 자신의 가면을 벗는다. 외면하고 완전히 잊었던 자신의 진짜 얼굴과 마주한다. 오직 음악에만 몰두하며 엄마와 딸에게 무관심했던 남자, 프레드는 명성과 환호로 둘러싸인 삶 속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사랑에게 등을 돌린다. 그 사이 아내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딸은 그런 아빠를 이해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한다. 순정이 남은 들 표현은 없었다. 정신병원에 갇힌 프레드의 아내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한다. 용서를 빌어도 들리지 않고 들리고 용서했다 한들 알 수 없다. 관계는 동결되고 영영 해동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 한들, 사인이 노화로 판명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영영 좁혀지지 않을 간격.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명성 뒤에 무정한 남편이라는 치부가 서슬 퍼렇게 숨겨져 있었다.


믹은 더했다. 선택한 결과로 봤을 때 믹은 자신의 맨얼굴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영화 인생과 함께 했다며 모든 자리에서 칭송하던 대배우 브렌다의 캐스팅 문제, 믹은 그녀가 출연할 영화이자 자신의 유작을 위해 수많은 동료들과 머리를 쥐어짜며 각본을 완성하고 있었다. 과정은 순조로웠고 오랜 현장에서 길러진 노장의 지혜와 감각은 돋보였다. 느닷없이 호텔로 브렌다가 날아왔다. 출연 거절 소식을 직접 전하기 위해. 비서를 보내 전화 한 통화로 전할 수도 있었지. 오랜 우정에 대한 예우였다. 반가움에 마주 앉은 믹의 환한 표정도 잠시,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브렌다의 입장은 변함없다. 영화 제작 자체도 브렌다의 이름 때문에 가능했다. 믹은 거장이었다. 한물 간 거장. 엉망진창인 최근작만 찍어대는 감독. 가장 믿고 원했던 배우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거절하고 있었다. 믹은 견딜 수 없다. 모욕과 수치, 절망과 혼란에 빠진다. 브렌다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나 아니었으면 몸이나 굴리며 살았을 아무것도 아닌 X, 브렌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난 모두 뒤로 한채 여기까지 왔고 이제 아무도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해. 믹은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대응을 하고 있는지 알았을까. 노장의 지혜는 어디로 갔을까. 브렌다가 떠난 뒤 믹은 넋을 놓는다. 프레드가 곁에 있었지만 믹은 이미 다른 차원에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되었고 다시는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기에 수치심을 안고 견뎌야 했고 견딜 수 없어 활짝 열린 창가로 향했다. 고요히 모든 것을 끝냈다. 자신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라 여겼을 거장은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프레드는 말릴 수 없었다. 믹의 모든 걸음이 무거웠고 몸은 한없이 가벼웠으며 끝은, 말린다고 나아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아지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어야 마땅한데 이 당연한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을 보며 프레드는 한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울었다.


호텔은 일상과 격리되며 가치가 증명되는 곳, 음식과 옷, 수영장과 사우나, 마사지와 숲, 공연과 고요, 스스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해주는 서비스, 유명한 자들이 알몸의 자유를 만끽하는 곳, 시간이 박제되고 호텔에 도달하기까지 이룬 성취들이 정지하는 곳, 그렇게 쉬며 다시 밖에서 더럽혀질 각오를 하는 곳,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의 나 사이의 세계, 육체와 정신의 긴장이 해제된 상태에서 어쩌면 가장 거대한 충격과 위기와 맞닥드릴 수 있는 곳, 천국과 지옥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경유하는 정류장. 준비된 비행기가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맨몸으로 허공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기도 하는 종착지. 믹은 아마도 호텔 밖의 모두가 자신의 진실을 알 거라는 두려움에 체크아웃을 포기한 건 아닐까. 타인에 의해 가면이 깨지는 걸 견딜 수 없어 스스로 깨는 것을 선택했다. 몸까지 깨지는 충격을 끝으로 인생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했다. 평생 좋은 뉴스만 들려주던 친구를 뒤로 한채.


노인에겐 시간이 없다. 남은 평생 괴로워하느니 소멸을 강렬히 원했다. 믹의 선택이었다. 프레드 곁엔 딸이 있었다. 레나가 진실을 말했고 프레드는 고통스러운 깨달음과 자살을 교환했다. 남겨진 자가 되어 속죄하며 자연사하는 길을 택했다. 여왕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고 아내 없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대표곡을 지휘한다. 아내의 막대한 희생으로 완성된 곡, 모든 명성의 기원, 그리고 지금은 장송곡. 프레드는 남은 삶에서 슬픔과 후회를 안고 가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이제 굳이 날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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