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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Dec 03. 2018

퍼스트맨, 아빠는 못 돌아 올 수도 있어

데이미언 셔젤 감독. 퍼스트맨






닐(라이언 고슬링)이 인류 최초로 달에 첫 발을 디딘 '퍼스트 맨'이 되기까지 많은 이들이 곁을 떠난다. 삶을 떠난다. 죽는다. 사라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당시 미국에서 닐보다 높은 중력을 견디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싶을 정도로 닐은 먼저 떠난 자들에 대한 중압감과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모두 감내한 채 기어이 달에 도착하고야 만 닐의 인간승리 정신력에 갈채를 보내는 게 맞긴 하지만, 단순히 인간승리 드라마로 잔향을 날리기엔 영화엔 다른 어둠이 많이 깔려 있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이 영화가 미국의 기상을 되살린 영웅의 일대기로 그려지길 거부한 듯 보인다. 닐은 단순한 개인을 넘어섰지만, 고난을 견딘 건 닐만이 아니었다. 닐은 모든 책임과 기대, 만인의 맨 앞에 서야 하는 기수였지만 그렇다고 타인들의 무게가 덜하다고 말하기 힘들다. 닐이 우주의 외로운 죽음을 견디는 동안 닐의 아내 자넷(클레어 포이)은 닐이 겪을 미지의 중압감을 상상하며 더 많은 우주의 무게를 지탱해야 했다. 닐이 견디며 나아가야 했던 사람이었다면, 자넷은 닐의 뒤에서 버티며 기다리는 힘을 길러야 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주변의 같은 사건과 다른 상황이 수없이 펼쳐져 있었다. 다르다면 닐에겐 우주복이 있었지만, 자넷에겐 없었다는 점이다. 자넷은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폭풍과 맨몸으로 맞서야 했다. 훈련 때문에 오래 자주 떠나 있어야 하는 닐이 없는 집에서. 말을 듣지 않는 세 아이, 아니 두 아들과 함께.


딸이란 어제보다 오늘이 더 예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나와 우리의 도로시가 그렇듯, 자넷과 닐의 캐런(루시 스태포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캐런에겐 병이 있었고 너무 일찍 곁을 떠난다. 자넷과 닐에게 목숨의 순서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주저 없이 단숨에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항공과학이 지구와 달의 거리를 좁히는 시대에도 의학은 삶과 죽음의 간극을 어찌하지 못했다. 캐런은 떠났고 땅에 묻혔다. 아이들 사이사이 모든 빈자리에 캐런이 보이기도 했다. 자넷과 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닐은 더 이상 지상에서 살 수 없었다. 그래비티의 라이언(산드라 볼록)이 그랬듯, 닐에겐 다른 진로가 필요했다. 대기권을 뚫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한숨의 산소도 남아있지 않은 우주 공간에서 닐은 겨우 가녀린 숨을 쉴 수 있었다. 닐이 우주로 날아가야 할  동기부여는 살아남은 자의 의무가 아니었다. 어쩌면 또 다른 의미의 자살이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캐런이 떠난 날, 닐도 같이 떠났다. 하지만 자넷은 지상에 남아야 했다. 자넷은 남은 자였다. 남아서 견딜 수밖에 없는 자, 벽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두 사내아이를 길러야 하는 자, 언제라도 홀로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야 하는 자, 남편이 우주의 먼지가 될까 봐, 그 두려움이 부담이 될까 봐 입 밖으로도 꺼내지 못하고 떨리는 눈망울만 깜빡여야 하는 자. 자넷은 남편 닐의 그늘에 숨은 아내가 아니었다. 자넷이 버티고 있어 닐은 지상 밖으로 나가 거대한 우주선을 도킹하고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어지러움을 견디며 캐런의 유품을 꼭 쥔 채 달에 착륙할 수 있었다. 자넷과 닐은 둘이었지만 하나였고, 캐런에게 인사하기 위해 같은 맘으로 달로 향했다.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죄책감을 달에 두고 올 수 있을까. 달을 볼 때마다 캐런에게 인사할 수 있을까. 캐런은 자넷과 닐의 영원한 상처였고 균열이었으며 또한 중력이기도 했다. 둘은 헤어질 수 없었다. 캐런을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 지우지 않기 위해.


과거 함께 있던 동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시절과 먼저 우주선에 탑승한 동료들이 또 한꺼번에 죽은 시간은 어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경험을 지닌 자에게도 쉽지 않은 무게일 것이다. 닐은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가벼워진다. 실제로도 우주선은 점점 작아지고 가장 작아진 형태가 되어서야 달 표면에 착륙할 수 있었다. 동료 중엔 달에 홀로 있을 아버지의 외로움을 걱정하던 아들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실제의 죽음과 죽음과 싸우는 수많은 과정과 신체와 정신의 한계를 극단까지 끌어올리는 유사 죽음을 수없이 넘기고 나서야 닐은 비로소 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 표면에 발을 디딘 퍼스트 맨이 될 수 있었다. 돌아와 다시 자넷과 마주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생명, 떠난 캐런을 영영 같이 추모할 수 있는 존재, 난 여전히 미국이 달에 실제 도착했는지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닐과 같은 인물이 만인의 뉴스 뒤에 숨어 있을 수 있었겠구나 라고 생각은 하게 되었다. 영웅은 만들어지고 이미지로 각인되어도 인간은 한정된 수명 안에서 눈물과 한숨을 겪는다. 세기를 뒤흔들던 전쟁은 저물고 우주는 아직도 멀기만 하다. 닐과 자넷 같은 사람들이 지금도 미지의 목표를 뒤로 한채 싸우고 있을 거라 상상해본다. 많은 것을 실제로 잃고 미치도록 힘겨워하며 다시 일어나 시작하려는, 비범한 삶 속의 평범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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