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마더
어머니
1. 여자인 어버이
2. 자녀를 둔 여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는 말,
3. 자기를 낳아 준 여성처럼 삼은 이,
4. 자기의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를 친근하게 이르는 말,
5. 사랑으로써 뒷바라지하여 주고 걱정하여 주는 존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엄마
1. 어린아이의 말로, ‘어머니’를 이르는 말.
2. [자녀 이름 뒤에 붙여] 아이가 딸린 여자를 이르는 말.
엄마는 가족,
엄마는 여자,
엄마는 엄마.
엄마는…… 누굴까?
그녀(김혜자)를 누구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녀는 엄마다. 아들(원빈)을 낳았다. 아들을 키웠다. 아들밖에 모르고, 아들 때문에 산다.(그렇게 보인다) 아들을 위해 삶은 닭을 찢고, 노상 방뇨하는 아들의 입에 약사발을 들이민다. 아들을 위해 달음박질하고 아들을 향해 소리친다. 아들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해맑아지고, 입이 귀에 걸린다. 칭찬이라도 들리면 자길 닮아서 그런다고 난리다. 사고 치면 무조건 싹싹 빈다. 자기 일이라면 저렇게 못하겠지. 아들 혼이 빙의된다 해도 저렇게는 못할 거다. 엄마는 아들이라면 환장한다.
그런 아들이 사람을 죽였단다. 정황상 거의 확실하다. 증거도 있고, 증언도 있고, 목격자도 있다. 입을 헤 벌린 아들은 모른단다. 기억이 잘 안 난단다. 가슴을 치고 답답해할 시간도 없다. 무조건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내 아들은 착하다. 알잖나? 내 아들은 누굴 해하지 못한다.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이것들아. 내 아들은 아니야! 해결해야 한다. 철창에서 빼와야 한다. 아이고 변호사님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돈도 드리고 밥도 사드릴게요. 제발 제 아들 편 좀 들어주세요. 엄마는 혈혈단신으로 온 동네를 휘젓는다. 밤이고 낮이고 비가 오나 안 오나 아들을 구하려 모든 수단을 불사한다. 법이 뭐라든, 정의가 뭐든, 옳고 그름 따위 중요하지 않다. 내 아들은 무조건 아니다.
과학과 이성의 뛰어난 논리와 명철한 심리분석으로 아들 가진 어미들의 속마음을 파헤칠 수 있는가? 이걸 가장 쉬운 언어로 풀어 그녀들에게 설명해주면 아 그렇군요 하며 행동에 변화를 가져올까? 세계 각국의 엄마들이 어떤 스타일인지 알 길 없기에, 가장 많이 보아 오고, 들어왔으며, 생각해온 대한민국 엄마들의 자식사랑은(그것이 사랑이라면) 꽤 흥미롭다. 어떤 가족관계도 저만큼 밀접하거나 치밀하게 엮여 있지 않다. 감정이입의 정점을 넘어선 이상적인(완전에 가까운) 자기화 수준이랄까? 자기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 상처보다 더 아프고, 자기 고통보다 더 괴로우며, 자기 기쁨보다 더 미칠 듯 좋아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자기애의 한 방식처럼 보일 정도다. 필연적으로 맺어진 아들이라는 남자에게 자신의 온 의지와 열정을 받쳐가며 자신이 살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자신이 느끼지 못한 부분을 느끼며,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뜻대로, 또는 자신이 정한 울타리 안에서의 아들의 뜻대로.
영화 ‘공공의 적’의 어미는 자신을 칼로 찌른 아들의 손톱을 주어 목구멍으로 욱여넣는다. 들킬까 봐, 주말드라마의 엄마들은 잘 키운 아들 하나 못난 계집이 채갈까 봐 다들 전전긍긍이다. 어딜 감히 내 귀한 자식을 넘봐! 영화 ‘올가미’의 어미는 장가보낸 정상인 아들을 발가벗겨 자신이 직접 씻기고, 책 ‘일본은 없다’에 나온 한 어미는 아들이 공부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 육체를 허락한다. 물론 곤충조차 자신을 파먹게 해 새끼들을 위한 마지막 희생을 하기도 한다. 허나 이 경우는 생존의 문제다. 그렇게 안 하면 바로 죽는다. 종족보존을 위한 하나의 방식이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자신들이 형성한 사회와 제도 안에서 엄마의 역할을 제어하지 못한다. 엄마는 아들에 대한 독점권을 지니고 있고, 그의 인생에 대한 결정권 또한 쥐고 있다.(고 일부 어미들은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끊임없이 합리화되고 허용되며, 누군가의 지적에 부정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내 아들이니까. 나 이상의 나의 아들이어야 하니까. 여성부가 100개가 생긴 들, 이런 어미들이 길들여 키워낸 남자들의 잠재적 권위의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 때 뿌리 박힌 고정관념이 박사 교육을 보낸 들 쉽사리 사그라들리 없다, 수많은 아들들이 의문과 불만을 품으면서도 자신을 해하지 않는 그 과도한 친절함을 받아들이고 결국 ‘엄마화’ 되는 쉬운 길을 택한다. 이로써 엄마는 잘 키운 자식의 어미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거머쥔다. 그리고 영원히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마더’의 엄마는 홀어미다. 아비의 존재란 온데간데없다. 딸자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붙어있는 핏줄이란 아들뿐이다. 몸은 다 자랐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한 아들. 그렇게 된 배경에 어미는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였나? 광기에 가까운 애착은 사죄의 다른 모습이었나? 아들에 대한 주변의 손가락질은 자신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형벌이었다. 아들을 해하려는 건 자신의 죄를 벌하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안 된다. 아들을 살려서, 나를 살려야 한다. 엄마란 이름으로 목숨을 다해 보살필 테니 제발 떠나지 말아 다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내가 버리려 했던 내 일부가 흉한 꼴을 당한다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린다. 이건 아들이 아닌 나의 사투.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의 여정. 그녀는 앞으로도 아들에게 평생 사죄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모자母子와 무섭도록 닮았으면서도 조금 다른- 그녀와 아들 간의 모진 연이다.
덧붙여,
2019년 5월, 봉준호 감독의
깐느 국제영화제 수상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