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음이 없다

에단 코엔, 조엘 코엔 감독.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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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을 갔다. 사람이 많았다. 어두워졌다.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어깨를 스치는 많은 사람들, 그들 중 나를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같은 공간 안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같은 공간 안에 살고 있다니, 아랑곳없이 인파는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였고, 난 외로움과 다른 묘한 공포를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무심함. 그들 앞의 나도, 내 앞의 그들도 우연히 눈을 마주칠 뿐 마음 쓰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 낯섦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뭘까?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는 듯한 이런 기분이란. 완벽한 타인, 그들과 나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 나약해진 시선이 길을 잃는다.


살인마 시거는 겁에 질린 상점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너의 생각이 무엇이든) 그걸 왜 내가 신경 써야 하지?”흥정도 하기 전에 모든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약자는 기적을 바라지만 상황을 즐기는 살인마의 눈빛에 흔들림이란 없다. 그에게 선택이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어떤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는 당겨질 수 있다.


거액의 돈과 상당량의 마약이 최종 목적이었다면 그는 여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가방의 행방을 아는 이가 모두 사라진 이상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찾아갔고 여자는 그를 보자마자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그 순간‘왜’라고 묻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그에게선‘그걸 왜 묻지?’라는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은 어릴 적부터 반복해온 학습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우린 그동안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이 있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우린 이것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과 얼마나 많이 마주하고 있는가? 멀쩡한 사람이 아무 잘못 없는 타인을 죽이는 일이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는 일인가? 동전 던지기의 결과가 살인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타당하냐 말이다.


만약 그를 잡아서 성장배경과 주변 환경을 조사하고 지금까지의 행적을 따져본다면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일들이 그가 살인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쳤군, 그래 이거면 설명이 되겠어 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여러 사건사례를 통해 가설이 수립되고 이론이 성립되지만 그것 또한 끊임없이 수정 보완되어야 할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연구를 담은 지식들이란 그저 과정의 일부분일 뿐 어쩌면 영영 의문을 풀어주지 못할 애매모호한 소리인 것이다.


살인마 시거에게 살인이란 인도의 돌부리 같은 것이었다. 발에 차인다면 넘어가면 그만인 귀찮은 존재. 어떤 의미도 부여될 필요 없는 판단 이하의 것. 마치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살인본능에 충실했던 그는 자신이 처한 고통에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그에게 치유란 없었다. 그에게 변화란 없었다. 그에겐 용서가 없었고 그에겐 마음이 없었다. 논리가 없었으며 예외도 없었다. 그에겐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완전한 죽임. 그의 존재는 이것을 통해서만 입증되었다. 그가 웃으며 경찰의 목을 조른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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