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 감독. 82년생 김지영
저래도 되나. 김지영(정유미)의 남편(공유)이 퇴근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아이가 있는 욕실로 들어온다. 아이 목욕시키기 위해 일찍 퇴근했다며. 지영은 고맙다고 말한다. 김지영 남편은 바로 아이에게 다가간다. 이상했다. 왜 손을 씻지 않는 걸까. 밖에서 돌아온 이후 왜 곧바로 아이에게 가는 걸까. 남편의 무감한 부분을 보이려는 설정일지도 모른다. 어떤 관객은 아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아빤데 그럴 수도 있지 이럴지도 모른다. 그게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담배 연기, 자동차 매연, 음식 냄새, 미세 먼지 등 더러운 바깥 환경에 장시간 노출된 손을 씻지도 않고 바로 딸아이를 씻긴다고? 그 손이 물에 닿고 딸의 피부에 닿을 텐데? 눈코입 속으로 세균에 오염된 물이 들어갈 수도 있는데? 저런 남편, 저런 아빠구나 싶었다. 누군가에겐 저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겐 절대 저래서는 안 되는.
김지영과 아이가 있는 함께 있는 영화 속 거의 모든 장면들을 보는 내내 도로시를 키운 1524일이 겹쳤다. 소리에 반응하며 불빛과 함께 굴러가는 장난감. 거실을 놀이터로 만드는 미끄럼틀, 아무리 빨고 개어도 계속 쌓이는 아이 옷들. 안겨 얌전하게만 있어준다면 너무 고마운, 희대의 발명품 힙시트, 가장 먼저 듣고 세상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거 하나라서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말, 엄마(영화에서는 아니지만, 또는 아빠), 아이 혼자면 외로우니까 하나 더 낳으라는 무심하고 잔인한 말들, 만삭일 때도 한겨울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했던 아내, 나는 비교적 다정하고 비교적 헌신적이고 비교적 가사를 하는 비중이 높은 비교적 '다른' 남자라고 세뇌하고 싶지만 얼마나 달랐을까. 영화를 아내와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도로시를 지금껏 키우면서도 겉으로 속으로 많이 울었고 (이 글을 쓰는 시점인 지금은 안 본) 이 영화를 보면서 겉으로 속으로 울 거라는 걸. 나는 얼마나 내게 많은 핑계를 대며 합리화했나. 얼마나 많이 주말에 소파에 들어 누웠나. 아이와 놀아준다는 핑계로 가사를 멀리 했나. 은연중에 아내가 더 해주길 바랐다. 당신은 엄마니까, 아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여자니까, 가사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테니까, 더 잘하겠지. 나보다 더. 얼마나 비겁했고 지금도 비겁한가. 스스로에게 한없이 너그러이 아내에게 조금 더 헌신적일지도 모르는 '다른' 남자라고 치켜세우며 평생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립서비스만 했나. 글로만 찬양했나. 나는 진짜 사람의 도리를 했나. 이런 자책도 한편으로는 개념 탑재한 남편, 다른 남자로 보이려는 술책은 아니고?
영화를 보며 네 번 정도 아 저 미친 새끼가...라는 혼잣말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그 장면들이 무슨 현실을 초월한 상상이나 환상 속 설정이었다면 웃고 넘겼을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 영화적 설정 어쩌고 이렇게 이해하며. 일상에서 직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들으며 욱했던 말과 행동들이 버튼을 눌렀다. 저런 미친 새끼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게 세상이고 삶이고 직장이라지만, 그게 내가 아닌 여성이라면 아내라면 여동생이라면 또는 미래의 도로시라면? 특히 엄마들을 벌레로 칭하는 단어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김지영이 주워 담던 얼음을 빼앗아 그 새끼 아가리에 쑤셔 넣고 더 극악한 폭력을 쏟아붓는 상상을 살짝 하기도 했다. 김지영은 그러지 않았다. 곁에 아이가 있었고 상대는 다수였고 장소는 공공장소였고 무엇보다 김지영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언이라고 똑바로 대응했다. 공유가 존 윅(키아누 리브스)이었다면, 아니 (용의자의) 지동철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듣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성적인 대응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욱했던 장면이 방금 전 장면이었다면, 가장 울컥했던 장면은 딸이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된 지영의 엄마 미숙(김미경)과 지영이 마주하는 장면이었다.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내가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어쩔 줄 모르며 딸을 달래던 미숙에게 지영은 단호하게 말한다. 미숙의 엄마(예수정)로 빙의하여, 딸 미숙에게 그러지 말라고 한다. 엄마의 살을 떼어내어 고통과 비명 속에서 만든 딸. 끝없는 노동과 희생으로 키운 딸. 미숙도 딸이었다. 지영이 딸인 것처럼. 딸의 삶은 엄마 삶의 복제품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미숙도 원하지 않았고, 미숙의 엄마도 원하지 않았다. 지영도 자신의 딸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네 명의 딸들이 이어져 있었다. 미숙의 남편이든, 지영의 남편이든, 남편이라는 기성품은 존재 자체가 가해자였다. 그들의 침묵이 그들의 생각 없는 말과 이기적인 결정들이 네 명의 딸을 여자의 역사를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관객석의 나는 다른가. 아니 절대.
여성에게 해로운 걸 하지 않는다고 나은 남성, 그나마 괜찮은 남성 축에 드는 건가. (이건 그저 인간 대 비인간을 나누는 기준 아닌가) 이것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인가. 나는 특정 대상에게 계몽할 수 없다. 변화를 고민하고 계획하고 실행할 때, 방향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이합집산 퇴화 중인 남성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곳 김지영 같은 여성을 위해? 아니, 그럴 수 없다. 불가능하다. 미약한 영향이 될지 몰라도 계획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내게 가장 가까운 82년생 김지영, 내 곁에서 20년째 있어주는, 나를 더 나은 나로서 살게 해 주었지만, 과연 자신도 그랬는지, 내가 차마 단언할 수 없는 존재, 나와 매일 보고 이야기하고 음식을 나누고 공간과 시간과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는 아내. 내 유일한 변화의 최종 대상은 아내다. 영화 한 편 보고 곰이 마늘 먹듯 개과천선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좀 더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잊고 있던 (어쩌면 무심했던) 생애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영화를 본 후 돌아와 두 개의 선물을 주문했다. (영화를 보다가 생각난) 아내의 이름이 적힌 펜과 얼마 전 아내가 성탄절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한 것. 내가 글로 말로 전하는 아내와 내가 현실에서 대하는 아내의 온도차는 내겐 없지만 아내에겐 다를 수도 있다. 나는 더 좋은 남편이 되고 싶다. 나는 나를 선택해준 사람에게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나와 아내와 우리와 도로시를 위한 유일한 방식이라는 걸 안다. (하루 종일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을 겪은 후) 수북이 쌓인 수십 벌의 아이 빨래를 홀로 개는 아내 김지영을, 멀리 떨어진 식탁에 앉아 홀로 캔맥주 마시고 홀로 과일안주 씹으며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저 바라보는 (자기 연민에 취한) 남편이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