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 감독. 신 희극지왕
여몽(악정문)은 바보다. 한길만 간다. 연기를 사랑한다. 숨 쉬는 내내 연기만 생각한다. 교통사고 부상자를 자해공갈단인 줄 알고 연기지도를 할 정도다. 단역 인생 10년, 여몽 아빠는 저런 딸을 보며 속 터져 죽기 직전이다. 특수분장이라며 식구들 밥 먹는 자리에 머리에 도낏자루를 꽂고 온다. 피도 철철 묻혀서. 여몽 아빠는 옛날 사람이라 다정하게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우리 딸?"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몇 년 전엔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짐가방 내동댕이치며 단역 인생으로 계속 고생할 거면 나가라고 한다. 여몽은 언젠가 연기로 만인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아빠랑은 어차피 연 끊을 일 없으니 귀 담아 듣지 않는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서른 살. 푸핫,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니.
같이 단역 하며 따라다니는 남자는 금수저다. 연기는 취미다. 노력 안 해도 난자 정자일 때부터 상류층이다. 같은 방을 쓰는 친구는 여몽보다 '외모가 예쁘다.' 길거리 캐스팅돼서 단숨에 주연이 된다. 연기 너무 하기 싫다고 여몽에게 짜증 낸다. 여몽과 결혼자금을 모으는 남자 친구는 사업을 한다. 여몽은 벌이의 거의 대부분을 결혼자금과 남자 친구 사업자금으로 댄다. 남자 친구는 여몽의 꿈을 늘 응원한다. 알고 보니 이 새끼는 사기꾼이다. 남자 친구 행세하며 여러 여자들 지갑을 탈탈 터는 개새끼. 여몽의 꿈과 도전은 비현실적인데 처한 상황만큼은 이보다 현실적일 수 없다. 여몽의 비극은 이게 다가 아니다.
연기를 하려면 지원을 해야 한다.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 타고난 외모와 연기 재능은 없어도 시체 역할이라도 하려고 우르르 진을 친다. 여몽은 그중 하나고 캐스팅 담당자 입장에서 여몽은 그들보다 나을 게 없다. 수많은 대체안 중에 하나고 그래서 대우가 열악하다. 폭력적이고 무례하며 밥도 안 주려고 한다. 당장 죽일 듯 막말하던 여몽 아빠는 몰래 따라다니며 스텝들에게 여몽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앞에서나 잘하지.
여몽은 포기한다. 식당일을 한다. 기회가 온다. 하지만 안 할 거다. 같이 일했던 한물간 배우가 꼬신다. 너를 보며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여몽은 흔들린다. 여몽이 제일 잘하는 건 포기하지 않는 거니까. 오디션을 본다. 세상 기인들이 다 모였다. 여몽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실제 경험의 재연 기회가 온다. 남자 친구 인척 응원하는 척 돈을 약탈하던 개새끼와 끝나던 순간을 떠올린다. 가해와 피해를 재연하고 재해석한다. 심사하는 사람들은 진짜를 본다. 그 순간을 시작으로 여몽은 유명 배우가 된다. 세상 수많은 여몽들이 오리지널 여몽을 보며 다시 꿈을 키운다. 포기하지 않는 하루를 무한반복한다.
어벤저스 스타일이 전 세계에 역병처럼 창궐하는 시대에 동화도 이런 동화가 없다.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라니. 착한 척 나쁘고 나쁜 척 착한 캐릭터 총집합이라니. 주성치의 신 희극지왕이 단 한 편의 영화이듯 여몽처럼 노력해서 성공할 확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성치만큼 영화와 코미디의 힘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증명해온 장인도 없을 테니까. 웃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여몽의 경우 같은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주성치의 영화는 이 보이지 않는 희박한 가능성의 이야기에 배우와 대사를 붙이고 연출을 통해 만인에게 공개한다. 이건 분명 가공된 영화지만 우리 삶에 숨어있는 살아있는 이야기라고. 한숨을 쉬면서도 믿고 싶게 만든다. 여몽은 수많은 나이자 지금의 우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