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하네케 감독. 해피엔드
위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라는 프레임이 그리는) 콩가루 집안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부자든 빈자든 개판인 집안은 널렸다.부자가 좀 다르다면 콩가루 상황에서도 걸친 옷이 좀 비싸다는 정도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 중 어느 노부부의 최후를 담은 아무르란 영화가 있다. 해피엔드는 아마도 아무르 이후의 이야기로 보인다. 아내가 떠나고 남겨진 노인, 조르주 로랑(장 루이 트린티냥)과 그 가족의 이야기.
각자에게 모든 삶은 현재이지만 누군가의 어떤 삶은 죽지 못해 이어진다. 자꾸 죽으려 해도 쉽지 않다. 몸이 부서지며 고통이 연장될 뿐, 죽음은 너무 오래 삶의 일부로 남는다. 죽고 싶은 삶의 시간이 살고 싶은 삶의 시간을 압도한다. 아내를 질식시켜 죽이고 조르주는 산 송장으로 남아 잘 듣지도 못하고 잘 죽지도 못하며 그러면서도 자꾸 자살을 시도하고 부탁한다.
조르주의 아들 토마스 로랑(마티유 카소비츠)은 재혼했다. 첫 아내는 병들었고 어린 딸 에브 로랑(팡틴 아흐뒤엥)을 남기고 죽었다. 토마스는 자신의 삶을 병든 아내와 딸에게서 분리했고,아내의 병이 깊어지자 (한번 버렸던) 딸 팡틴을 집으로 데려온다. 이미 재혼했고 아이까지 낳은 상황. 이방인. 팡틴은 이 집의 외딴섬이다. 팡틴은 토마스의 가족이면서도 토마스의 (더 큰 테두리의) 가족, 로랑 가문으로 이민 온 셈이었다. 토마스의 맥북에서 팡틴은 음란 채팅을 발견한다. 토마스의 지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대화였다. 아빠에게 이미 한번 버려졌던 팡틴은 두려웠을 것이다. 아빠가 새 여자를 선택하고 자신과 엄마를 버렸듯 이번에도 다른 새 여자를 선택한 후 자신을 다시 버릴지도 모를 테니.팡틴은 세상을 떠난 엄마가 먹던 약을 털어 넣고 자살시도를 한다.
영화는 가족을 대사로 정의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게 있다면 끝장나고 있거나 이미 끝장나버린 곳이 가족이었다. 토마스는 부르주아 가문에서 자란 의사라는 지위에도아내와 딸 등 가장 가까운 모두를 병들고 죽게 만든다. (아내의 죽음은 아이의 혐의가 있지만, 그 시작점은 아빠의 부재로 인했다고 믿고 싶다) 그러면서 가여운 표정으로 난 아직 서툴다고 징징거린다. 영화가 공포 스릴러 장르였다면 팡틴은 토마스를 가장 먼저 독살하거나 다른 영리한 방식으로 죽였을 것이다.
이미 꺼져가는 삶과 무너져 가는 가족 속에서 조르주와 팡틴은 공통점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다를 뿐, 이미 어떤 최후를 선고받은 삶. 나이가 다를 뿐, 하루라도 빨리 생을 끝내고 싶은 버림받은 사람들. 피로 이어졌지만 너무 다르고 세대가 멀지만 방치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존재들. 또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게 되는 연회에서 상처 받은 가족 구성원이 축하받고 싶은 가족 구성원과 갈등하며 난장판이 벌어진다.
조르주는 더 이상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유산들이 딸과 손자가 죽지도 못하는 자신의 몸뚱이 앞에서
저 지랄하는 꼴들을 지켜보고 싶지 않다. 팡틴에게 부탁한다. 여길 나가자고. 부탁한다. 저기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바닷속으로 날 밀어달라고. 지상에서 내 삶을,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형벌을 제발 끝내 달라고. 파도는 출렁이고 있었고 팡틴은 아무 말이 없다. 조르주를 태운 휠체어만 파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가문 '로랑'가문은 공사현장에서 보여주듯 말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결혼은 모두 실패했고 남편들은 아내들을 방치와 질식 등 각자의 방식으로 죽여 없앤 후 그 사이에서 낳은 후손들은 방치했다.가족 살인자를 선조로 둔 후손들의 삶이 온전할 리 없었다. 어린 소녀마저, 엄마처럼 죽도록 버려질까 봐 스스로죽음을 시도하게 만든다. 해피는 한 줌 없고 오직 엔드만 남은 곳.가족은 탄생부터 절망이다. 그걸 숨기려고 주변인들은 박수를 친다. 몰락의 과정을 먼발치에 수군대며 지켜본다. 나만 당할 수 없지. 모두가 가족이고 가족이라면 절대 해피할 수 없지.
영화 바깥에서 어떤 가족은 행복할지도 모른다. 너무 희귀해서 풍문으로만 존재하고 영화라는 학계에 아직 보고되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