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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한나의도시 May 11. 2016

정어리

서대경









비 그친 여름날의 정오

바람이 흰 새가 되어 펄럭였다.

가로수 가지마다 흰 새들이 내려앉았고

그 수가 점점 늘어났다.

하늘은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고 ,

거리엔 정어리가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는데, 그녀가 말하길 도시가 텅텅 비었으며 지금 이 도시엔 당신과 나뿐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자꾸만 새가 되는 것은 당신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인데, 자신의 꿈 속으로도 이런 흰 새들을 들여놓고 싶으며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당신의 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내 꿈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내가 내 꿈 밖으로 나가게 되면 당신을 꿈꿀 수가 없으므로 낭패가 아닌가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말하길 확실한 것은 당신과 나는 꿈을 꾸고 있으며 (여기서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는데)

사실 당신은 내가 꾸는 꿈 속의 꿈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잊지는 않았지만,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어투에는 얼마 간의 정어리적인 기질이 들어 있었고

그것은 내가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었던, 그리고 마침내 어젯밤에 일기장에 적어놓았던 나의 강박적 증상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형상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비통한 기분으로 말없이 그녀를 따라 그녀의 침실에 도착했다.


  침실 안은 정어리로 가득했고 그녀가 커튼을 열어젖히자 정오의 햇살을 받은 정어리들이 신선하고 차가운 푸른색을 발하며 빛났다.



그것은 어떤 낯선 영원의 형상처럼 느껴졌고 ,

나는 황홀해져서 그녀에 대한 우울한 심사를 잊게 되었으며 그녀를 정어리 위로 눕힌 다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것 봐요, 새가 날아와요.

그녀의 크고 깊은 눈 속 저 밑바닥에서 희고 보드라운 새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꿈이 더욱 거대해지기 전에 나는 내 꿈 속의 그녀의 꿈에 일정한 법도와 절차를 부여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으므로 차츰 침실과 정어리와 햇살과 나의 꿈은 사라져갔고 대신 그녀의 눈과 그녀의 숨결과 그녀의 피와 그녀의 깊은 눈 속 저 너머에서 물결치듯 아득히 밀려오는 하얀 새들만이 사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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