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kadi Oct 19. 2023

일은 내게 마이너스 투성이다 (2)

하지만 내 인생까지 마이너스일 순 없으니까!


2. 20대 후반, 2년차 직장인 그리고 어중간함에 대하여. 



원래 내가 되고자 했던 것은 방송국 프로듀서였다는 것을 기억하시는지. 플랜 B를 위한 준비를 다 마치고 나니 4학년이었다. 이제 진짜 플랜 A-언론사 시험 준비에 집중할 때였다. 하지만 이쯤되니 다 귀찮았다. 아무렴, 아무 일이나 하지 싶었다.


무엇보다 실제로 방송사 시험을 쳐 보니, 이건 뭐 바늘구멍에 머리 집어넣는 격이었다. 언시생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나는 결국 시험 준비를 그만두었다. 도저히 내 정신머리가 버티질 못하겠다는 결론이었다.


혼란 끝에 제작사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쌓아온 스펙들은 단 한 줄도 써먹을 수가 없었다. 인정해주는 곳이 없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수개월을 흘려보냈다. 아르바이트며 계약직이며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운 좋게 모 그룹 정규직으로 합격했다. 유명하고 나름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었다. 얼마나 설레던지! 어떻게 하면 임원이 될 수 있지? 일하다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친구가 될 수도 있나? 실없는 망상도 해주며 말이다.


하지만 한 달 뒤, 나는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어디 가서 그 회사를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 회사와 나, 서로 마찬가지가 아닐까. 직원들을 이름 대신 “야”라고 부르던 곳, 회의 때마다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던 곳, 전자 담배를 피면서 회의를 하던 곳. 현장에서 누가 멱살을 잡았다더라 소문이 무성하고 신입이 도망갔을까봐 출근 시간도 아닌데 전화를 걸어 오고 있느냐고 묻는 곳이었다.


회사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 쉬는데, 머릿 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여긴 아니라고. 그렇게 동기 세 명이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하게 됐다.


대표님에게 우린 망할 MZ세대 막내들이었겠지. 어차피 욕 먹을 거 그냥 권고사직 때려달라고 물어나 볼 걸 그랬다. 동기들은 우리가 당한 걸 신고조차 하지 못한다며 억울해했다.


재취업은 또 얼마나 어렵던지. 직무 고민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등 방황 비슷한 걸 하다가 지금의 회사를 만났다. 겨우 방송 일을 시작하게 됐다.     


자, 이제 일을 시작했으니 친구들을 만나 푸념을 한 번 늘어놓아 볼까. 그런데, 어디다 하소연 하기 참 애매하다. 방송 업계, 특히나 중소 제작사는 확실히 일반 사기업의 문화와는 달랐다.


직전 회사에서 겪은 일들을 사기업에 취업한 친구들에게 말하면 당장 신고해라 길길이 날 뛰지만, 방송계 종사자 친구들에게 말하면 원래 그렇다는 듯 버티다 이직하라고 조언해준다.


그런 한편 동시에 스타트업이나 여타 중소 기업의 특징도 다 가지고 있다. 체계적인 시스템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고, 사수에게 배운다는 생각은 사치다. 그냥 큰 책상 하나를 두고 함께 일한다. 신입끼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경우도 많다. 일에 대한 뾰족한 문제 정의나 해답이 존재하지 않아 몇 시간이고 마라톤 회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동아리방에 온 것 같단 생각을 한다. 누구보다 낭만적으로 일하지만, 그러나 낭만‘만’으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곳이다. 서로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게 돼 싫은 소리도 하기 어렵다. 이토록 어중간할 수가 있나.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일관되지 못한 특징에 쓸데없이 또 자기 연민과 센치함에 빠져들곤 한다.


미처 해소하지 못한 고민과 걱정거리는 오롯이 업계 선배들과 논의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데, 선배들을 찾기도 어렵고, 찾아도 그들이 너무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는 것 또한 업계 특징인 것 같다. 고민이 계속 늘기만 하는데, 이래도 일이 마이너스가 아니라고!          




3.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     



이쯤에서 말해두어야 하는 게 있다. 나는 사실 겁이 매우 많고 신중하여 실행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모험보단 안전함을 추구하며, 본능적으로 안주하길 간절히 원하는 성향이다. 소심하고 체력 또한 좋지 않아 조금만 말을 많이 하거나 머리를 쓰면 금방 지친다. 사회 생활을 하기에 최약체다.     


고로 일 그 자체는 내게 마이너스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일과 일이 가져온 부정적인 것들을 통해 성장하고 나아갔다. 지금껏 푸념해온 모든 것들이 실은 그 증명이다. 마이너스들이 서로 시너지를 낸, 부정할 수 없는 결과다.


거절당해도 몇 번이고 다시 도전해보는 용기와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꾸역꾸역 기간을 채워 출근하는 끈기. 그러나 아니다 싶을 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과감하게 관두는 용기와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


어이없게도, 산책을 반복하며 얻은 기초 체력도 다 일을 하면서부터 갖게 된 것들이다. 처음부터 내게 있던 것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성장했다고 말하려니 참으로 낯부끄럽지만, 아무튼.     



산책하다 만난 풍경.



성장은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당사자는 고난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알기 전에 남이 먼저 알아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혹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스스로 알아차리거나.


일이 얼마나 내게 마이너스인지 줄줄줄 써 내려간 일기장이나 임시저장 글을 다시 읽어보면 다들 그제야 ‘나’의 개인적 성장이 보일지 모른다.


일이 내게 마이너스라고 말하는 나는 사실, 누구보다 욕심이 많았고 잘살고 싶었고 일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길 기대했다는 걸 이제야 인정한다.      


처음 PT라는 걸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근육이 커지려면 근육에 상처가 나야 한다고 했다. 회복되고 상처 입고 회복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근육은 성장한다고.


나는 정신도, 인생도 마찬가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쌓아온 스펙이 죄다 어중간한 궤적일 뿐인 줄 알았으나 결과론적으론 쓸모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데이터가 오늘의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무엇보다, 마이너스라는 불안함이 동력이 될 때가 있었다. 오늘은 더 잘 해야 해, 그때처럼 망하지 않으려면 오늘은 이렇게 해보자- 생각하고 실행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마이너스인 나의 일과 일이 가져온 모든 마이너스들은 결국 나를 플러스로, 조금 더 나은 나로 성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내게 일은 마이너스지만, 내 삶은 마이너스일 수가 없다.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절대 떨어질 일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마이너스들이 앞으로 또 어떤 시너지가 날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Q. 안녕! 독자들을 위한 간단 자기소개 부탁해.


A. 방송 업계에 종사한 지 햇수로 2년차가 된 김경림이야!


Q. 처음 주제를 들었을 때, 글감이 바로 떠올랐어? 어떤생각을 하면서 썼는지 말해줘.


A. '아, 이런 내용으로 써야겠다.' 하는 방향은 바로 잡혔어. 평소에도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나 고민하는 편이거든. 그런데 요새 방송 쪽이 많이 어려워져서 일하면서 겪는 고충이 늘었어. 그래서 더 일이 내게 남긴 게 무엇일까,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등등...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하면서 글을 썼던 것 같아.


Q. 글을 쓰면서 어떤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


A. 스스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오랜만에 자각하는 기분을 느꼈다는 거? 예전에 쓴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는 기분이었어.


내가 쓴 글에 만족하거나 맘에 든 부분이 있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글 자체 보다는 이번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맘에 드는 부분을 찾아봤어. 그동안 내가 일했던 행적을 쭉 적으면서 나도 '아, 내가 확실히 이런 부분들이 바뀌었구나' 새삼 다시 느꼈거든. 그런 점에서 마지막 파트가 맘에 들었다고도 할 순 있겠다!


Q. 마지막으로 사회초년생들에게 한마디 부탁해!


A.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인생 길다~! 너~무 길다!

나는 나이에 연연하게 되는 내 모습 보면서 가끔 놀라. 머리론 아직 아가인 거 아는데, 사회에서 자꾸 아니라고 하니까, 거기에 물이 들어 주눅이 들더라고. '아, 넘 늦었어.' 그런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어떤 순간에도!





김경림
- 2년차 콘텐츠 기획 프로듀서
-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늘 궁금한 사회초년생


이전 09화 일은 내게 마이너스 투성이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