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 인생까지 마이너스일 순 없으니까!
일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푸념을 빼놓을 수 있을까. 일하는데 통장 잔고는 계속 줄어드는 어처구니없는 나날의 연속과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몸뚱어리. 취직한 순간부터 밀려드는 온갖 고민.
아니, 누구야? 누가 취직만 하면 인생이 술술 잘 풀린다고 했어? 잘 풀리는 건 내 생에 휴지밖에 못 봤구만. 따지고 들게 너무나 많다. 이렇게 따져보자니 일은 내 삶에 마이너스인 것 같다.
하지만, 일이 마이너스라고 해서 내 인생까지 마이너스일 순 없는 법이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지 않나.
방송 업계라는 냉정하고도 불확실한 판에서 이제 겨우 발을 뗀 2년차 기획 프로듀서. 이 어중간하고 건방진 미생이 일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서툰 사회 생활의 궤적이 남아있고 일반화를 남발할 수도 있으니, 부디 가벼운 맘으로 껄껄껄... 너그러이 읽어주시길!
1) 여긴 어디, 난 누구?
누가 정한 지는 모르겠지만, 라떼는 말이다. ‘국룰’이 있었다. 3학년 때 무조건 인턴을 해야 한다는 룰. 3학년 이후에 인턴을 하는 건 너무 늦단다.
인턴 경험이 없으면 취업에 불리하고 심지어 인턴도 2회 이상하면 안 된다는 말도 있었다. 인사 담당자가 “쟤는 왜 정착을 못하고 인턴만 해?”라고 생각해서 안 뽑는다나 뭐라나. 인턴을 위한 준비는 대개 2학년 때 많이들 이루어졌다.
마침 2학년이 된 나는 엘리트 코스 같아 보이는 전설 속 선배들의 행적을 따라가고자 했다. 인턴 마치고 칼졸업, 칼취업. 그리고 30대가 되면 내 집 마련! 아, 얼마나 멋있어. 내 꿈은 원래 피디였지만, 하나만 준비하다가 피를 볼 순 없었다. 그렇게 피디 준비생이던 나는 예정보다 빨리 구직 시장에 들어설 준비를 시작했다.
다들 그렇듯, 지원하고자 하는 분야를 명확히 설정했고, 그에 맞는 어학 성적과 공모전 수상 경력 심지어는 창업 경험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몇 번의 탈락 끝에 나는 간신히 컨벤션 제작 대행사의 계약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직장인이 될 수 있다! 이제 탄탄대로일 거야! 설렘 반, 걱정 반 첫 출근 전날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새록하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모 박람회 개최를 위한 내부 기획 회의가 열렸다. 실장님이 들어와 말씀하셨다.
“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3개월. 콘셉트는 명확하게 나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짓말! 그건 거짓말이었다. 막상 기획에 들어가니, 콘셉트며 주최 의도며 뭐하나 명확한 게 없었다. 업무 분장이 되어있는 듯, 안 되어있었다. 이런 것까지 신입이 손을 대도 되는 건가? 싶은 모든 걸 홀로 수행해야 했다. 콘텐츠 기획 직무로 들어갔던 나는 하루아침에 콜드메일과 콜드콜을 하루에 몇백 건씩 돌리는 영업직이 되어있었다.
[상사의 결혼식, 얼마나 내야 할까요? 입사한 지 한 달 된 사회 초년생입니다.ㅠ...]
나도 이런 고민을 좀 하며 평범하게 생활하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발주를 끝내야 하는 전쟁터에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플 거면 행사 끝나고 아프란 우스갯소리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을 때였다.
“oo아, 연사 섭외는 어떻게 되어가니?”
“아, 그거 제가 지금 A사 컨텍중...인데 (저 혼자 하는 건가요?!)”
몰랐다. 나 혼자 모든 연사를 다 섭외하는 건 줄은. 어쨌거나, 박람회 이름이 있고, 회사 경력이 있다보니, 나는 섭외가 좀 수월할 줄 알았다. 패기롭게 아마존 회장도 섭외하고 애플 누구누구도 섭외하고 싶었더랬다.
개인적으로 해당 국가의 시간대에 맞춰 국제 전화까지 걸어가며 섭외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쯤되면 누가 말려주길 간곡히 바랐으나, 다들 각자 할 일이 바빴다. 나는 포기하고 국내 전문가를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행사 한 달 전이 되었다.
내 몫의 일도 못 끝내는 무능력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크서클을 한 아름 매달고 결국 호소문인지 섭외문인지 모를 대본을 썼다. 그리고 무작정 어느 대기업 회장 직통 비서 번호를 알아내(이것도 어떻게 해낸 건지 모르겠다) 전화를 걸었다.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역시나, 섭외가 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날 얼굴도 모르는 비서님과 동맹 관계가 되어 꽤 긴 시간 동안 고충을 나누었고, 전화 울렁증을 극복했으며, 영업 경험 +1 덕분에 다른 대기업의 전문가를 섭외할 수 있었다. 기뻐서 또 밤을 새워버렸더랬다.
시간과 체력 그리고 택시비(행사 한 달 전엔 거의 12시 넘어서 퇴근했다). 잃은 건 너무나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건 무엇일까? 전화 울렁증 극복? 자신감? 영업 경험? 내가 섭외한 연사는 최종적으로 발표자로 채택되지 않았다. 윗선의 결정이었다.
2) 뽑아놨더니 애가 왜 이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박람회가 끝났다. 계약직 한 번 만에 세상사를 통달한 기분이었다. 뭐든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감이라기보다는 해탈에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이 들어가길 원하는 꿈의 IT 기업의 인턴에 도전했다. 이번 인턴까지만 하고, 플랜 B를 마무리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같은 기업에 다섯 번쯤 떨어지길 반복하니 부아가 치밀었다(직무 간 중복 지원이 가능했다). 심지어 서류 탈락 결과를 받았음에도 해당 공고가 계속 떠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맘에 드는 지원자가 없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맘에 들 때까지 포트폴리오를 수정해주마!
시간 싸움이었다. 밤새 포트폴리오를 손봐 다시 지원했다. 기적처럼 면접에 올라갔고, 합격했다. 꿈만 같았다. 내가 진짜 여기서 인턴을 해? 여기서?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박람회 제작 일로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린 탓에 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더불어 상명하복이 분명하고 다소 딱딱했던 연구원 분위기와 전혀 다른 기업 문화를 접하니,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고, 심각해져 갔다. 밥 먹었냐는 간단한 물음에도 버퍼링이 걸렸다. 사수가 사주는 우동을 먹으면서 밀가루를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레전드 사회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내가 만약 그 당시 내 사수였다면, 나를 뽑은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을 거다. 실제로 모 선배가 나를 뽑는 걸 조금 반대했다고 한다.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 우려가 현실이 된 셈이다. 그들은 ‘얘는 지금 쌍둥이가 출근한 게 아닐까?’ 생각했을 듯도 싶다.
선배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점점 변하는 걸 느끼며 겨우겨우 출근하는 데 급급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멋진 사람들 틈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무엇보다 롤모델로 삼고 싶은 멋진 여자 직장인분들이 많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우는 것 투성이였다.
그래서 여기 있으면, 있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할까, 그치만 다들 잠깐 정신이 나가서 그냥 날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고 하면 좋겠다’ 하는 요상한 심보도 함께 품고 버티고 버텼다.
번아웃이 오면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 누구든지 만나서 푸념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든다. 하루는 아빠에게 미친 척하고 전화를 건 적이 있다. 참고로 우리 부녀는 통화 횟수가 손에 꼽는다.
“안 되겠다! 우리 딸 보고 싶어서 내일 가야겠다!”
눈치 빠른 사람. 별말도 안 했는데 저렇게 말하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문 모르는 아빠는 내가 우니까 같이 울었다. 부녀가 울고 있으니 엄마는 혀를 찼다. 기가 막힌 광경이었을 거다. 퇴근 후 무작정 나가서 옥수역부터 청담역까지 한강을 따라 주욱 걷는 것도 일상이었다.
벤치에 앉아 저 멀리 마지막 야경이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 좋았다. 우연히 마주친 친구를 보고 오열을 했던 적도 있다. 자기 연민에 찬 글을 쓰지 않기 위해 무척 조심하고 싶은데 그 정도로, 계약 기간 동안 정말 죽지 않고 살아있기 위해서 나는 갖은 애를 써야만 했더랬다.
...
김경림
- 2년차 콘텐츠 기획 프로듀서
-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늘 궁금한 사회초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