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한 것도, 취업을 위한 교육을 이수하고 있는 것도,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닌 존재 ‘니트(NEET)’는 쉽게 말해 백수를 뜻한다. 회사 홈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회사놀이를 통해 무업기간을 전환의 기간으로 보낼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제법 멋진 목표를 가진 회사였지만,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놀이에 불과한 일이겠지만 백수랑 일을 하는 건 꽤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백수를 떠올리면 흔해 빠진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랐다. 방구석에는 술병이 쌓여 있고, 머리는 3일쯤 안 감아야 하고, 오후 2시나 3시에 일어나고 아침 5시에 잠에 드는 사람들. 완전히 똑같진 않았지만 입사 직전 백수였던 나도 꽤나 비슷하게 살았다.
하루 종일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누워있다 보면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 의미가 조금은 흐려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백수 사원이라는 사람들도 그런 게으르고 팍팍한 시간을 보내는 인간들이겠지.
그런데 정작 입사하고 보니 그 회사에 다니는 (갓생사는) 백수들은 몹시 바빴다. 가끔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면 그들이 논-백수 사원인 나보다도 바쁜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백수 사원들은 출근시간인 10시마다 단체 대화방에 “출근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퇴근시간에는 “퇴근해보겠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업무시간에는 커뮤니티 플랫폼에 ‘업무 인증’을 올렸다. 구체적 업무는 본인 스스로 정해야 했기에 다들 각양 각색의 업무를 했다.
누구는 매일 달리기를 하는 업무를 정하여 매일 자신이 달린 거리수를 측정한 사진을 올렸고 누구는 시를 썼고, 누구는 강아지 산책을 시켰으며 누구는 그림을 그렸다. 너무 오랜 시간 돈 받는 직업을 가지지 못해 혼자 고립된 백수 사업들은 특별한 업무를 하기도 했다. 이불 개기, 영양제 먹기, 아침에 일어나기, 그리고 일상을 회복하기.
돈 받는 직원으로 내가 하는 일은 인사팀 업무였다. 출근하지 않은 백수 사원에게 연락을 해서 출근을 시키는 것과 퇴근하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야근하는 사원에게 빨리 퇴근하라 독촉하는 일이 내 몫이었다. 출근은 했는데 업무 인증을 안 한 사원들도 체크하여 관리했다.
일반 회사와 다른 것은 무단 결근과 조퇴, 태업이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원들이 돈 받는 일도 아닌 커뮤니티 인증에 힘썼다. 매일매일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증 사진과 글을 썼기 때문에 커뮤니티 플랫폼 사진첩은 언제나 알록달록했다.
“최고예요!”
“오늘도 아침에 잘 일어나셨군요! 고생하셨어요.”
“언제나 꾸준히 무엇인가를 도전하는 게 정말 멋져요”
알록달록한 사진들 아래에는 다른 백수 사원들이 남긴 댓글이 달렸다. 이들은 수 개월간 커뮤니티 인증 글을 올리다가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자신의 ‘일’을 자랑하기 위한 전시회를 준비했다.
스스로 정한 일이 아주 온갖 것들이었기 때문에 전시회에도 아주 온갖 것들이 전시되었다. 이불 갠 사진, 달리기 km 수 인증, 자신이 그린 그림이나 지은 시를 프린트한 프린트물, 지우개를 파서 만든 도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라고 쓰인 선언문, 옷이나 초상화 등등.
그 곳에 있는 많은 것들은 세상이 ‘전시할 만한 것’으로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잔뜩 꼬인 사람이 그 전시회를 봤다면 하-!하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백수 사원들의 곁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 모든 전시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봐왔다.
백수 사원들과 함께하는 주간 회의에서 누군가 그 말을 했다. 나름대로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멀끔한 셔츠를 입고 면접을 보던 사람이었던 그가 그 이야기를 하는게 의외였다.
“공백기가 길어지는 것도 무섭긴 해요. 하지만 회사가 더 무섭다는 생각도 해요.” 주간회의에 참여한 여러 백수 사원은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시작하자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냈다.
“시험 준비를 하다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서 신입으로 취업이 불가능해졌어요.”
“금요일에 인사팀에서 말하더라고요. 이제 다음주부터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일을 하다 병을 얻었어요. 도저히 더 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애초에 화장실도 가기 어려운 회사였어요.”
“저는 사실 지금도 불면증이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나의 마지막 퇴사가 떠올랐다. 고작 3개월 정도 일한 곳이었다. 인수인계도, 보직지정도 없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회의록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 그 동안 썰물 빠지듯 직원들은 사표를 던졌거나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개월 후면 인원이 반토막이 날 위기였지만 추가 채용 소식은 없었다. 입사한지 이틀만에 나와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는 직원들이 퇴사 예정이라는 사실을 듣고 생각했다. 아, 이게 취업사기라는 거구나.
그럼에도 정말로 나는 잘 일해보고 싶었다. 나이가 60이 넘는 대표를 잘 설득해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가 하루에도 몇 번 대표실로 나를 불러 컴퓨터 사용법(주로 드래그, 사진 전송 방법이었다)을 물어볼때도 군말없이 매번 처음처럼 알려줬었다.
다른 직원들 욕을 할 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 노력했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조직 내부에서 하고 싶은 프로젝트 기획안을 스무장이나 썼다. 그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에 모든 것은 극복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다가 옆자리에 앉은 나이 어린 직원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2년간 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임금은 갓 입사한 내 임금보다도 적었다. 내 임금조차도 수습기간을 핑계로 최저임금 미달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졌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내가 이 모든 불의에 가담하는 것 같은 미칠듯한 공상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입사한지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그 이후엔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회사를 떠나기 전 나는 그와 나의 미달된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사회에 제출할 증거 자료를 모으고, 매일같이 녹취를 따고, 노무사에게 노무 상담을 받았다. 모든 증거를 수합한 후 제출할 때 대표는 우리의 노력을 “개인의 욕심”이라 폄하했다.
우리는 일한 만큼의 돈을 달라고 한 대가로 희생적인 직원에서 탈락하여 되바라진 젊은 여자애들이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래도 몇 개월간 더 참은 대가로 체불임금 전액을 받고 퇴사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다. 그렇지만 모든 불쾌한 기억들이 금융치료로 한 방에 나아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헌신하다가 헌신짝 된다는 말이 옛말이기만 한 것은 아니란 사실을 그 회사에서 알게 되었다. 회사를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지. 아무도 믿지 말아야지. 손해보지 말아야지. 열심히 일하지 말아야지. 그 생각을 하며 퇴사를 했다.
퇴사 직후 직접 만든 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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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 -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 <판을 까는 여자들> 저자 - 돈 안되는 일을 더 잘하는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