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1년쯤 다니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이러다 죽는 건가? 눈감았다 뜨니 1년이 지나있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별로 한 게 없는 거 같은데.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더니 1년이 훌쩍 가버렸다. 이렇게… 뭔가 이룬 게 없이 1년 차가 되어도 되는 걸까? 다들 이렇게 살다 퇴직하는 건가?
물론 매월 통장 잔고가 늘어가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취업 직전에 전업투자를 하며 세상과 시장의 쓴맛(?)을 봤기에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통장 잔고가 늘어나도 마음 한구석은 쓸쓸했다. 이 쓸쓸한 마음은 소득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 일이 재미가 없었다.
사람은 일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낼까. OECD가 발표한 보건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3.6세라고 한다.
여기에 노동시간을 대입해 보자. 한국행정교육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전체 취업자의 연간 실노동시간은 21년 기준 1915시간이라고 한다. 내가 26세부터 피고용인의 입장이 되었으니, 현재부터 60세까지 노동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 총 노동시간은 약 65,000시간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시간이다.
일생의 반 이상을 일하며 살아야 하는데 일을 싫어한다면, 인생의 반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일을 좋아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하던 일은 내게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습관이 되면 힘들지 않다’는 법칙에 의거해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아침마다 출근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힘들진 않았다. 회사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일이 재미가 없었다.
일이라는 게 돈을 받고 그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고등학생 때 친구들 혹은 후배들에게 자기소개서 첨삭비를 받고 첨삭을 해줬던 것이 나의 첫 일이었다. 대학 진학 이후에는 장학금과 공모전으로 돈을 벌어 아르바이트 없이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으니 이것도 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게나마 들어오는 소득들은 내게 더없이 뿌듯한 감정을 안겨줬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나중에 어떻게든 내 한 몸은 먹여 살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무엇보다 즐거웠다.
스트레스도 적당했다. 생활비가 떨어져 갈 때 즈음엔 공모전 상금이나 강연비가 들어왔다. 다양한 일을 한꺼번에 진행했다. 다음 달까지 공모전 마감, 이번 달에는 동아리 공연, 다음 주는 원고 마감, 뭐 이런 식이었다. 매년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에 기타 소득을 신고했고, 연말정산 시기가 끝나면 세금을 환급받기도 했다.
이렇게 조금씩 소득 활동을 이어갔던 시절에는, 자유롭게 내 아이디어를 펼치고 원한다면 누구와도 접촉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보단, 그냥 하고 싶은 일을 바로 해왔다.
입사 후에도 이런 생활이 이어질 줄 알았다. 막상 회사에 들어왔더니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회사에 나의 온 리소스(체력과 시간)를 다 뺏겨버려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연초부터 진행하던 스터디들은 입사하고 야근이 잦아지자 점차 삐걱대기 시작했다. 스터디원들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는데... 퀄리티 낮은 운영으로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순간들이 이어졌고, 결국 중단한 스터디도 생겼다.
운 좋게도 개인의 의견이 자유롭게 반영되는 부서에 들어가게 되어, 존경하는 실장님과 팀장님의 비호 아래 여러 일을 맡아보긴 했지만, 6개월이 지나고 9개월이 지나고 1년 차가 다 되어갈 때쯤 결국 인정했다. 재미가 없다.
나는 다소 불량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부서는 ‘규칙 없음’ 책을 감명 깊게 읽으신 실장님의 ‘책임 있는 자유’ 철학에 기반하여 자율적으로 연차를 쓰곤 했다. 급한 일이 없으면 당일 휴가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메신저에 ‘저 오늘 반차 쓰겠습니다’를 남발했다.
‘출근하기 싫다’는 기분을 그때 처음 느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성장을 한 건지, 아는 게 좀 늘었는지, 회사라는 공간 안에서 충분한 아웃풋을 냈는지 자신이 없었다. 인사평가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그게 내 성장에 대한 지표는 아니었다.
반차를 내고 침대에 드러누워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1. 우선 직무가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인턴으로 막 입사했을 당시에는 TF였던 조직이 얼마 지나지 않아 리서치 조직이 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처음 입사 당시에는 신규 사업을 위한 리서치나, 사업을 기획하는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정책 연구 업무를 맡게 되었다.
2. 그 직무는 내가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일이었다.
나는 조별 과제를 할 때조차 자료조사 담당이 되는 걸 기피했다. ppt나 발표를 제일 잘한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다행히 나와 같이 일했던 직원은 유능한 사람이었고, 그가 리서치하는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퀄리티의 차이가 컸기에, 보통은 그의 리서치를 바탕으로 내가 적당히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해 보기 좋게 가공해 내보내는 식으로 일했다.
3. 그러다 보니 못하던 건 그대로 못하고 잘하는 것만 계속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신생조직 특성상 성과를 보여줘야 했기에 부서원들이 합심해 일을 해내야 했고,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해치우는 것이 중요했다. 원래 잘하던걸 하다 보니 내 실력의 향상은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4.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나가지 못했다.
인원수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나가면 확실히 누군가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턴이 끝날 때쯤 계속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실장님의 말에 ‘그래도 1년은 있자’라는 생각을 했다.
5. 사람들이 너무 좋았다.
그때 조직 구성원이었던 모두를 너무나 좋아했다. 훌륭하고 좋은 분들이었고, 이런 분들과 일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세상에 대해 많이 배우기도 했다.
분명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원하는 일에 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월급이나 생활의 안정보다는 그 기준이 충족되는 게 더 중요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내가 원하는 일은 내가 잘 할 수 있고, 하고 싶으며,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즉, ‘업’을 찾고 싶었다. 평생에 걸쳐 이룩하고 싶은 목표를 갖고, 일생의 반 이상을 그 업을 위해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말하자면 사명을 찾고 싶었다. 사명이라고 표현하면 다소 종교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업 개념도. 이미지 본인 제작.
아무튼 이왕 태어난 김에 가치있는 일을 하고 죽고 싶었다. 2018년 스타트업(業)캠퍼스라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 업(業) 개념도를 본 이후로, 언젠가는 꼭 나만의 업을 찾겠단 결심을 했다. 18년부터 이어진 내 모든 활동들은 그런 업을 찾기 위한 일환이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사회 운동과 정당 창당에도 관심을 가졌다.
다양한 경험을 하다보면 업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여겼다. 스타트업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분석하는 스터디를 운영하고, 대표들을 만나 창업하지 말라는 조언을 듣기도 하고. 비영리단체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경험해보고. 어쨌든 뭔가 이루려면 돈도 필요하니 투자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회사도 그런 차원에서 지원했다. 새로운 산업을 세상이 어떻게 대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신기술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그 기술이 악용될 때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비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과 생각의 괴리는 컸다. 그걸 깨달았으면 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 다른 경험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좋으니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마음을 접지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1년은 다니자고 다짐했을 때 만들어둔 마음 한켠의 카운트다운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장 어떤 일을 찾아 떠나야하나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난 아직 업의 ㅇ자도 찾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어떤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는 이제 확실히 알겠지만. 도메인지식도 얻긴 했지. 리서치만 하고 싶지는 않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 다음에는 어떤 경험을 찾으러 어디로 가야할까? 고민이 계속되었다.
...
치혜 - 아직 업을 찾지 못한 사회초년생 - 직장 내 대표 MZ 취급받는 중 - <디지털자산 시대가 온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