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기 한창 불량했던 나의 근태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확인해 보니 일주일에 2번은 반반차를 썼더라. 엄연히 말하면 법정 연차를 몰아서 사용한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행동이 근태를 중요시하는 한국 직장사회 풍조 상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했다.
그래도 우리 팀원들은 날 걱정해 줬다. 팀장님이 ‘요즘 너의 근태를 보니 고민이 정말 많구나. 무슨 고민을 하고 있니 중생이여.’라고 물은 기억이 난다.
팀장님은 내가 퇴사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뜯어말렸다. 짧은 경력은 취업시장에서 별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조금만 더 생각해 보라고 한다던가, 사내에서 다른 일을 벌일 수 있게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과 재미있는 일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라,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을 좋아하시는 실장님께서 신사업 개발 업무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셨다. 너무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었다. (아무튼 리서치와 일을 위한 일, 사내 행정 업무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음에 기뻐했다.)
새로 맡게 된 일은 어려웠지만 그 전의 일보다 훨씬 뾰족한 고민이 필요했고, 규제 안에서 사업을 꾸려나가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본격적으로 보고서가 필요한 업무기도 했다.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상호 배제 및 전체 포괄) 방법론을 바탕으로 보고서 지문에 들어가는 내용이 중복되지 않으면서 입체적인 정보 전달이 가능하게 논리를 구성해야 했다. 정리되지 않았던 정보들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구조화해야 했다.
MECE의 예시. (출처 : 위키피디아)
경험해 본 적 없는 방식이었고, 내 보고서는 끔찍했으며 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재밌었다.
보고서를 쓰다 보니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동안의 나는 업을 찾기 위해 경험을 더하기만 해 왔다. 진입장벽이 있는 일도 있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그 경험들은 분명 내게 플러스가 되었고, 일을 고를 때의 기준점을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바라는 일은 찾지 못했다.
그동안 플러스라고 생각했던 경험들은 사실 소거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중복된 값을 쳐내고 정보들을 다듬다 보니 내 단점과 장점이 명확해졌다. 아직 내 무기가 없었다.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정도의 기량이 없으니, 어떤 업에 종사하더라도 유용하게 쓰일만한 나만의 무기를 길러내야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이제 더하기가 아닌 빼기를 하기로 했다.
경험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게 아니다. 물론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도 수없이 많겠지만, 그걸 전부 해보며 진로 탐색 시간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 퀄리티를 추구할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더 나은 방식으로 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로 정했다. 그렇게 나만의 방법론을 하나씩 만들어가면 없던 전문성이 생기겠지.
최근 실장님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실장님은 아마존에서는 ppt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오로지 6장의 페이지로 핵심적 정보를 얻고, 토론한다고 했다. 그때 내가 아주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충 요령을 피워도 남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기만 하면 금전적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에, 진지한 빌딩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월급을 주기 힘들 것 같아 창업을 그만뒀고, 하루 정도 고민한 내용으로 공모전 서류를 내고 화려한 ppt와 그럴듯한 숫자로 심사위원들을 속여 넘겼다.
‘일은 돈을 받고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프로가 되어야 한다.’ (이것도 실장님이 해주신 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게 하는 방법은, 받은 만큼의 퀄리티로 보답하는 일이겠지. 테이블이 올라도 확실한 아웃풋이 보장된다는 신뢰가 있다면 돈을 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에 대한 시장의 수요는 늘어나기 마련이니 가격 형성 원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연봉이 더 올라간다. 전문성이란 그 ‘보장된 아웃풋’인 셈이다. 나는 프로답게 일한다는 것에 대해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은 사직서를 냈다. 원래 회사와 헤어진 상태다. 1년 6개월 계약직 신분을 청산했다. 실장님 팀장님과는 아직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채 2년도 되지 않은 회사생활, 적어 내려가니 후회가 많이 남는다.
시간이 남을 때 좀 더 뭔가를 배울걸, 하기 싫은 일을 더 열심히 해볼걸,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재미가 없고 의욕이 나지 않는다고 요령을 피우고 외면해 왔던 시간들이 이젠 아깝게 느껴진다.
회사에서의 고난과 역경도 스쳐 지나간다. 정규직 전환 시기가 오자 갑자기 비용을 감축해야 한다며 1년 더 계약직을 유지하라고 한다던가, 이해하기 힘든 조직개편을 명목으로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권고사직을 당하기도 했다.
떠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사람들이 좋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1년 6개월을 다녔다. 1년 다니고 말았으면 난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을 텐데, 6개월 더 다녔다고 생각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타이밍이란 뭐고 인연이란 뭘까? 1년 전 재미없는 일을 하다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고 억울해했던 나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업을 찾는 내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다만 방향은 크게 달라졌다. ‘업을 찾고 거기에 내 자리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라고 가볍게 생각해 왔는데, 지금의 수준으로는 요령이나 피우다 제대로 된 책임을 짊어질 기회도 못 얻을 듯싶다.
업을 찾더라도 산업, 직무, 일자리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겠지. 막연한 업 찾기 여정, 드디어 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그만뒀다면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당장 할 수 있는 범주의 일들만 깔짝대며 살았을 수도 있었겠다. 슬픈 일이다.)
기회가 왔을 때 붙잡기 위해 나를 갈고닦아서, 이 일에 정말 어울리는 것은 나라고 말할 수 있게, ‘제대로’ 빼보도록 하겠다. 빼고 빼면 핵심 추출물이 눈에 보이겠지. 난 그걸 가지고 많은 것을 해보고 싶다.
Q. 간단 자기소개!
A. 안녕! 신산업/정책에 관심이 많은 곧 2년 차 직장인 노치혜야.
Q.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내용을 쓰려고 했는지!
A. 사실 비정규직의 삶이나, 동료들 얘기를 해보려고했어. 그런데 막상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리' 보다는 '일'에 대한 얘기를 쓰고 싶어 지더라. 부당한 일을 경험한 것은 맞는데 그게 별로 내 인생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진 않은 것 같더라고.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런 걸 되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싸우지 못한 게 조금 아쉽네!)
Q. 제일 마음에 드는 문단!
A. 그동안 플러스라고 생각했던 경험들은 사실 소거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중복된 값을 쳐내고 정보들을 다듬다 보니 내 단점과 장점이 명확해졌다. 아직 내 무기가 없었다.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정도의 기량이 없으니, 어떤 업에 종사하더라도 유용하게 쓰일만한 나만의 무기를 길러내야 했다.
이 부분!
Q. 마지막으로 사회초년생들에게 한마디!
A. 먹고살기 힘들다! 그래도 잘 살자!
치혜 - 아직 업을 찾지 못한 사회초년생 - 직장 내 대표 MZ 취급받는 중 - <디지털자산 시대가 온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