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엔 통섭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개념을 자소서에 녹여내기 위해 한창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또 한창 몰입이라는 개념이 유행하고 있더라.
T자형 인재, 통섭형 인재가 중요하다, 직무 지식에 대한 깊이도 있어야 하지만 폭넓은 교양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는 필수다, 뭣하면 제2외국어도 추가해라, 많은 경험을 해야 하니 어학연수 워킹홀리데이도 다녀와라.
아무튼, 요즘 애들(이라곤 하지만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 4년제 대학생 기준이다. 편협한 정의 미안하다.)은 세상이 말하는 그 모든 조건을 채우기 위해 대학교 1학년엔 진로 수업, 2학년엔 인턴, 3학년땐 직무 교육 및 실습, 4학년땐 본격 공채준비에 돌입하는 삶을 살아오곤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기본적인 영어 성적과 엑셀 자격증은 이미 가지고 있다. 공기업 공공기관을 준비한다면 한국사 자격증. 물론 직무 관련 자격증도 두세 개는 취득하셨고, NCS 대비를 위해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학원에 다닌다. 사기업 입사지망생들은 대외활동 경력을 화려하게 채운다. 동아리, 공모전, 프로젝트, 심지어는 창업까지.
하도 이런 경험들이 상향평준화되다 보니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스스로 죄책감마저 든다.
지금의 취업준비생, 사회초년생들은 '스펙 포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쨌든 세상에 자기 자신을 구겨 넣기 위해, 이왕이면 너무 구겨지지 않기 위해 '좋은 기업'에 가고 싶어 노력한 흔적들은 친구들의 이력서에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겪고 입사한 기업의 그 '자리'가 정말 마땅한 자리였을까?
운 좋게 괜찮은 일자리를 만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로라는 인생 첫 회사에서 퇴사하며 일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해 비참하게 집으로 달아나는 패배자가 되었다는 감각을 얻는다.
김서는 야근은 물론 주말 출근까지 불사하지만, 포괄임금제의 이름 아래 추가 수당을 받지 못한다.
민주는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노무사와 상담하며 수개월 뒤 임금을 돌려받는다.
경림은 무능력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 최선을 다했던 직장에서 퇴사한 뒤 번아웃으로 원하던 직장에 적응하지 못한다.
치혜는 정규직 전환이라는 명목으로 입사해 비정규직 1년 6개월 이후 계약만료로 퇴사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한 자리 찾기의 과정 속에서, 최소한 자신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임금지급을 요청하거나 퇴사하는 선택을 하면 '요즘 애들'이라는 말을 듣는 게 '진짜' 요즘 애들의 현실 아닌가?
구글에 MZ세대를 검색해 보면 MZ 세대의 특징이라며 이런 글이 보인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다, 새로운 트렌드를 빨리 받아들인다
사생활을 중요시한다, 사적인 연락을 싫어한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선호한다, 자신의 개성을 중시한다
이런 특징들이 회사에서 실제로 겪는 한 명의 사람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듯, 그 이름 아래 한꺼번에 포괄된 그 나잇대 청년들이 겪는 문제들은 각기 다르다. 우리들의 에세이가 그랬듯이.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민주의 말마따나 '흔해빠진' 일이어서, 이 나라의 흔한 직장이 다 갖고 있는 문제겠지.
그래서 막 입사한 MZ사원 한 명이 '사이다'를 날려주길 수많은 직장인들(베이비부머세대 X세대 Y세대 등)이 기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조직문화 하나를 바꾸는 것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이 글을 읽는 people&culture팀 담당자라면 이해할 것이다. 갑자기 그린듯한 MZ 신입 한 명이 튀어나와 당신이 원하는 바를 회사에 관철해주진 않는다.
보통은 퇴사를 한다. 그것도 아득바득 버티려고 노력하고 나서야. 구겨지고 나서야 퇴사를 하는 '요즘 애들'이 많다는 게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럼에도 퇴사를 결정한 그 누군가는 '최선을 다해 적응하려고 했나' 자문하며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죄책감에 젖어들겠지. 로라가 그랬고, 또 나의 다른 친구들이 그랬듯이.
'일'을 하는 것에 '자리'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만난 '자리'가 자신을 있는 힘껏 구겨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라면 어떨까. 그래서 2023년 8월 기준 무직청년 2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그냥 쉬고 있는 게 아닐까.
친구들에게 '일'과 삶에 관한 프로젝트를 친구들에게 제안하며,
이 이야기가 무엇을 세상에 남길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일'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모두에겐 좋은 '자리'가 필요하다.
좋은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국가사회적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누구보다 일을 좋아하고 싶어 하고, 많은 '스펙'을 쌓으며 언젠가 좋은 자리를 만나기를 기대하는, 회사와 나의 동반성장을 꿈꾸는 청년들이 기회를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
부정적 경험도 성장의 일환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런 자리는 오래 있기 힘들다. (부양가족만 없으면 때려치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일자리 말이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좋은 자리를 만드는 것은 모든 조직 구성원의 역할이며, 그 누구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나부터 좋은 자리 만들기에 기여하면 되지 않을까.
막 들어와서 눈치나 보고 있는 신입사원들한테 너무 큰 짐을 지우지 말길 간곡히 부탁한다. 어차피 밀레니얼 세대에 40대까지 포함되는데, 왜 MZ라는 단어는 유독 신입들에게만 붙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욕처럼 들리기도 한다. 스스로 적응을 잘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다. 부디 이 단어를 신입사원에게 쓸 때는 한번 더 생각해 주길. (사실 적응하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꼴이 이 글을 읽으시는 팀장급 이상 관리자 분들의 신입 시절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함께해 준 내 친구들과 이 글을 읽어준 사회초년생들에게 전하고 싶다.
앞으로 점점 더 좋아질 거라는 낙관은 내려놓지 말자.
로라가 소설을 다시 쓰기 시작하고,
김서가 신입사원들에게 의지가 되는 대리로 회사에 남고.
민주가 백수들의 회사를 퇴사하며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기억해 내고.
경림이 산책과 마이너스적 경험으로부터 성장을 경험하고, 회복탄력성을 찾고.
치혜가 찾고싶은 업의 방향성을 조금이나마 정했듯이.
우리는 정말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지만 잘살아보자.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
- 일하고 싶지만 일하기 싫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