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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adi Oct 16. 2023

무능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1)

사회 생활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




1.

2023년 10월. 지금은 내가 두 번째 회사에 입사하고 1년여가 지난 시점이다. 최근 회사가 너무 바빠서 이 글도 출퇴근 버스에 앉아 쓰고 있다. 다행히 환승 없이 버스 30분, 도보를 합쳐도 40분 이내로 들어오는 회사에 다니고 있어 그렇게까지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무환승 버스 출퇴근’의 기쁨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바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지금 회사에 나름 만족하며 다니고 있고, 일이 나의 삶에 가져다주는 것들에 관해 쓰려고 한다. 내게는 놀라운 일이다.


만약 몇 년 전 시무룩하게 ㄱ동의 사무실 안에 앉아서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던 내게 누군가 ‘일이 당신의 삶에 어떤 의미인가요?’ 하고 물었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

온통 마이너스예요, 라고.


그리고 당장이라도 그 회사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을지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 마음으로 혼자 궁리했겠지.       




2.

201n년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비로소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완전한 사회인이 되었다.  대학 시절 내내 딱히 미래로 이어지지 않을 일들에 몰두했고 취업 준비랄 것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어디로도 갈 수 있지만 그래서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때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존재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대학 공부가 무척 적성에 맞았기 때문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할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왠지 도망치는 일처럼 느껴졌다. 돈을 버는 세계를 향한 두려움으로부터.


대학원이라는 세계의 엄혹함을 무시한 건 아니고, 대학원에 가면 부와 모가 내 학비와 생활비를 댈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대학원생이 된다면 인문학을 공부하게 될 것이었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은 보통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가는 대신 구직 어플을 깔고 아무 데나 이력서를 뿌렸다. 그리고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고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렇게 나는 매일 한 시간 반 거리의 ㄱ동으로 출퇴근하는 서울의 직장인이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회사란 무엇인가’하고 자주 생각했다. 질문이 찾아오는 건 위기가 있을 때라고들 하는데 그때도 딱 그랬다. 당시 내 인생은 위기 그 자체였다.



회사에 관한 전형적인 상상력을 보여 주는 애니메이션 <페이퍼맨>.



회사란 무엇인가? 영화나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에서 황폐화된 현대 사회를 그리고 싶을 때 완벽하게 구획된 회색 파티션 안에 앉아서 경직된 반복 작업만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한 떼의 회사원들을 보여주곤 한다.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할 일도 없고 무의미 속에서 시들시들 말라간다.


하지만 그건 사무직의 현실이 아니다. 적어도 내 현실은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회사 생활은 날마다 새로운 문제가 벌어졌고, 날마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과 소통해야 했다. 현대는 분업과 전문성의 사회이고 대다수 사람들은 혼자서 일할 수 없다. 우리가 마주한 일은 대개 누군가의 손을 거쳐 누군가에게로 넘어간다.


이런 시대에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물건을 만드는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홀로 일할 수 있다는 건 충만한 기쁨이다. 내게는 그런 기쁨이 없었다. 일은 언제나 타인으로부터 왔고 언제나 예측할 수 없었다. 날마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는 건 계획성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차라리 회색 파티션으로 구획된 상상의 회사를 동경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적어도 그곳에선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테니까. 늘 공포에 떨면서 회사에 다녔다. 무능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하지만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는 막막함에 늘 시달렸다.


일평생을 계획 없이 살아온 탓에 나에겐 어떤 일이든 결국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는 근거 없는 낙관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 일은 어떻게든 되지 않았다. 낙관이 사라진 자리엔 내가 모두 파악할 수 없고 처리할 수 없는 일들만 아연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모든 공포가 어디서 발원하는지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어서 이 무능한 기분이 ‘일’이라는 존재의 본원적인 특성이라는 착각을 했다.      




3.

그 회사는 1호선의 종착지를 잘 골라서 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나는 늘 환승역에 비몽사몽 서 있다가 내가 타면 안 되는 객차에 무심코 올라 타 버리곤 했다. 그러면 나랑 전혀 관련도 없고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는 이상한 역에 내려서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텅 비어 있는 낯선 역사에서 나는 홀로 선 채로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충동과 싸웠다.


당장 역사 밖으로 뛰쳐 나가서 모르는 거리를 조용히 걷고 싶은 충동. 내가 속하지 않은 곳을 배회하고 싶은 충동. 사무실 안에서 간절히 바라던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 멋진 것을 확인하러 가고 싶은 충동.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내 바깥으로 나가고만 싶었다. 그 일은 내게 마이너스였고 나는 실제로 그곳에서 많은 것을 빼앗겼다. 나는 낙관을 잃었고, 나 자신을 향한 신뢰를 잃었으며, 한낮에 할일 없이 동네를 배회할 지유를 잃었고, 기상 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특권도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을 쓸 여유를 잃었다.


그것은 사무실 안에 앉아서 바깥을 상상하면 꼭 따라붙는 욕망 중 하나였다. 소설을 쓰고 싶다.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무언가 좋고 필요한 것을 만들고 싶다.


사실 소설을 향한 나의 욕망에는 꽤 오랜 역사가 있다. 어린이 시절에도 ‘노랑 가방’이나 ‘끝없는 이야기’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마음을 홀딱 뺏기고는 했다. 특히 ‘노랑 가방’에는 내가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느끼는 멋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리지아 보중가 누니스의 동화 <노랑 가방>.



그 책에는 어른이 되고 싶은 욕구, 소년이 되고 싶은 욕구,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노랑 가방의 주머니 속에 숨기고 그 욕구들이 때때로 코끼리만큼 무거워지는 것을 견디면서 가방을 둘러메고 다니는 소녀가 나온다. 소녀의 가방에는 차츰 여러 친구가 찾아오게 되는데, 그 중에 수탉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수탉은 어느 날 싸우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다 꿰매어져서 싸우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싸움닭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탉은 그 친구가 싸움을 그만두게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그 친구는 홀로 싸움장으로 떠나 버렸다. 소녀와 수탉이 뒤늦게 그를 찾으러 갔을 때에는 바닥에 핏자국과 그의 깃털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소녀의 가방 속에 살던 우산 아가씨가 그의 발에 걸려 싸움장까지 따라왔다가 그의 최후를 목격했다. 우산 아가씨는 소녀에게 자신이 본 것을 진술했지만 소녀는 그 죽음을 믿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우산 아가씨가 잘못 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녀는 이야기를 쓴다. 그에게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한 이야기. 죽지 않고 행복을 찾아 떠나간 이야기. 부조리와 억압으로 오래도록 고통받던 누군가가 마침내 그것에서 벗어나는 이야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


나는 여전히 이야기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저히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슬픔이 있다. 누구나 한 명으로 한 번밖에는 살 수 없다는 슬픔.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슬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슬픔. 누구나 자신의 육체에 갇혀 영원히 홀로 살아야 한다는 슬픔. 언젠가는 모두 각자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슬픔.


이야기는 그 공포스러운 슬픔들을 거짓의 거울로 비추어 언뜻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준다.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만큼만 벌어질 수 있다. 그 무한과 한계 속에서 인간은 인간의 슬픔을 보고 또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드는 건 내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제의이다.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는 동안 계속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회사에 다닐 때 그 두 가지는 공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직장인이 퇴근해서 집에 도착해 씻고 밥먹고 뭔가 하다 보면 이미 열 두시라는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한다는) 괴담은 우리 세대에게 익숙하지만, 그때는 시간이 부족한 것 보다도 마음이 어딘가에 짓눌려 있어서 쓰지 못했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내일도 일을 해야 한다는 공포를 외면하느라 계속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는 일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만 같았다.




...


로라

-생애 두 번째 회사에서 직장 생활 중
-소설 쓰기를 좋아함
-<판을 까는 여자들>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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