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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adi Oct 16. 2023

무능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3)

사회 생활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



6.

여전히 공포를 모두 벗어내지 못하고 어영부영 백수 생활의 끝자락을 보내던 나는 6월 즈음 한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싫어했던 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고, 나보다 먼저 그 회사를 떠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다른 회사에 들어갔는데 자신과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어떡할래요?


어떡하냐고 물으시면, 당연히.

하겠다. 고 대답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삶에 계획이 없어서 오는 기회를 안 막는 편이기도 하고, 그분이 제안한 직종이 이전 회사의 업무보다 더 마음에 들기도 했다. 끝이 있는 프로젝트여서 평생의 진로 선택이 아닌 잠시 고통스러운 진로 고민을 유예할 수 있는 합법적인 보류 기간으로 느껴지는 점도 플러스였다.


그래서 나는 그 회사에 입사했다. 다시는 회사에서 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의외로 절벽 끝에 서 있는 기분을 느끼지 않고도 그런대로 회사 생활을 잘해 나가고 있다. 이전 회사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이유를 목록화했던 것처럼, 이 회사가 비교적 버티기 수월한 이유도 목록화할 수 있다.


1 : 일단 나는 나름 회사 생활을 한번 경험해봤다는 이유로,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2 : 이 회사에는 나를 무척 신뢰하고, 나도 그를 신뢰하고, 언제든 뭐든 물어볼 수 있는 사수가 있다.


3 : 일이 그렇게 정신없이 쏟아지지 않는다. 하나의 큰 프로젝트를 긴 기간을 두고 진행한다.


4 : 나름 적성에 맞는 일이다.


5 : 회사와 집이 그렇게 멀지 않다. 버스 한 번으로 도착할 수 있다. 그 정도다. 여기에도 나름의 고충과 고민들이 있지만, 이제는 뭐든지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낙관적인 마음을 먹을 수 있다.


6 :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진행은 터무니없을 만큼 느리고, 그렇게 훌륭한 이야기가 될 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일이 나의 일상을 통째로 잡아먹는 무언가가 아닌 일상의 일부가 되었을 때, 소설도 자연스럽게 내 일상의 일부로 들어왔다.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내게 있다. 그 감각이 이 회사에서의 경험을 플러스로 만들어 준다.


이곳에서 때로 내 첫 회사를 아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언제나 그 회사가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도 대부분 그 바쁨을 견디지 못해서 탈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쉽다고는 말해도 내가 어리석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버텼으면 좋았겠지만, 버티지 못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는 듯이.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처음 일을 그만둘 때 느꼈던 기분들, 나는 역시나 일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비참하게 집으로 달아나는 패배자가 되었다는 감각들과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일의 세계란 별다른 곳이 아니었다.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었다. 쓸모없고 모나고 이상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다 어떻게든 그 세계 속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었다.          





7.

다들 어떻게들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건 여전히 내 인생의 난제다. 모두가 일을 하면서 자신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것이 늘 불가해하고 경이롭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주변에 지금 하는 일을 10년 후에도 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래도 모두가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계속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어디에서든 또 다시 나의 무능함과 겨루며 사무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


그래도 이제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낙관이 어느새 내게 돌아온 것을 발견한다. 유능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무능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일은 무언가를 빼앗아 간다고만 생각해 왔다. 첫 회사에서 나는 그 믿음을 깨지 못했다. 지금 나는 일이 내 삶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다. 어쨌든 일은 계속 나의 삶에 무언가를 가져다준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돈이든, 경력이든, 세상에 제대로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안정감이든,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드는 규칙적인 생활이든. 고민과 고충이든,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이든, 내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든.


일을 하면 새로운 일이 벌어지고 나는 인간으로서 하루를 더 살아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야기도 피어날 것이다. 내가 찾고 싶은 이야기는 고립된 방 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을 것이다.


노랑 가방을 메고 다녔던 소녀는 쓰고 싶은 것을 다 쓰자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아주 작고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그 후로 소녀는 쓰고 싶은 게 생기면 뭐든지 다 썼다. 그래서 그 욕구는 존재조차 눈치채기 어려운 가방의 일부이자 삶의 일부로 소녀에게 남았다. 그리고 삶이 계속된다. 그건 내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방법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도 불가피하게 그것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삶이 계속된다.




*다큐멘터리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 우파와 혐오의 아이콘으로 변질된 개구리 페페 캐릭터. 원작자는 페페의 소생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그를 죽이지만,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페페가 부활해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간다.







Q. 안녕,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남겨줄래?


A. 안녕, 난 로라야. 지금은 작은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소설은 아님ㅋㅋ). 아직도 진로 고민을 끝내지 못한 평범한 청년 세대야.


Q. 처음 주제를 들었을때,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어?


A. 이 글의 시작이 되는 아이디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어. 백수 생활을 거치고 다시 취직한 후에 어쨌든 내게 일은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플러스'해 주는 일로 느껴지는데, 처음 취직했을 때의 나에게 물어봤다면 무조건 '마이너스'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이야기. 이 변화에 초점을 두고 글을 쓰면 되겠다 싶었어. 물론 쓰는 과정에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어....


Q. 이 이야기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단을 하나만 꼽자면?


A. 동화 《노랑 가방》에 관해 이야기한 부분을 좋아해. 나는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고, 이야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정말 좋아하거든. 사실 내가 앞으로 어떤 걸 쓸 수 있을지도 아직은 모르겠고, 가끔은 정말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건가 싶기도 해. 그럴 때면 이야기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얹는 게 좀 부끄러운 기분도 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쓸 때는 즐거워. 그 문단은 내용이 금방 금방 떠올라서 쓸 때도 엄청 빨리 썼어.


Q. 마지막으로 사회초년생들에게 한마디 부탁해!


A. 솔직히 나는 아직도 미래가 상상이 되지 않고, 특별한 계획도 없어. 지금 일이 아주 싫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힘든 면도 있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어.


그래서 누구에게 한 마디를 남길 자격이나 되나 싶지만, 사회 생활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라는 것만 알아 주면 좋겠어. 나는 몰랐었거든.




로라

-생애 두 번째 회사에서 직장 생활 중
-소설 쓰기를 좋아함
-<판을 까는 여자들> 공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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