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kadi Oct 17. 2023

열정은 모르겠고, 안정은 있습니다 (1)

난 누구보다 오래 회사에 남을 것 같다



“김 대리님은 누구보다 오래 회사에 남아 계실 것 같아요.”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마다 빼먹지 않고 듣는 소리다. 고작 2년 차에 이 칭찬인 듯 저주인 듯한 이야기가 익숙해졌다. 대표까지 해 먹을 것 같단다. 끔찍한 소리.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난 누구보다 오래 회사에 남을 것 같다.


주기적으로 퇴사 러쉬가 일어나는 건 대부분 중소의 특징이겠지만, 특히 퇴사가 가장 잦은 우리 팀에서 겨우 2년가량을 지낸 나는 이미 회사의 NPC 같은 존재다.


함께 온 친구들은 물론, 그 이후 들어온 친구들조차 지금은 없다. 퇴사하며 하는 말은 비슷하다. 생각했던 일이 아니다, 일이 너무 힘들다, 일에 스트레스받는다, 사람에 스트레스받는다. 모두 동의한다.


퇴사하는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면 다들 또 이별의 말을 전한다.


“너는 진짜 여기 오래 있을 것 같아.”

아니, 지는 나가면서 이게 무슨 소리래.


“부럽다. 나도 너처럼 무던하게 다니고 싶어.”

아니, 나도 종종 머리털 뽑힐 만큼 스트레스받고 구석에 처박혀서 울기도 하는데!


그래도 어쨌든 ‘퇴사’ 하지 않고 있으니 다 무탈해 보이나 보다. 하긴 나도 너무 힘들었으면 퇴사를 했겠지. 그리고 운 좋게, 퇴사하지 않을 만큼만 힘든 내 회사 생활은 일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안정으로 굴러간다. 열정을 찾던 때도 있었지만, 영 소식이 없어 안정을 벗 삼았다.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한동안은 누군가의 퇴사가 곧 나의 고뇌였다. 동료에 대한 걱정이 아닌 나에 대한 걱정과 내가 가는 길에 대한 걱정이 줄줄이 이어졌다.


왜 이탈하는 거지? 이 회사에 문제가 있나? 내가 이 길을 가도 괜찮은 걸까? 문제를 인식 못하고 이 길을 계속 걷는 내가 이상한 걸까?


내 분야에 열정이 있다면 이런 고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일에 열정이 없다. 대표와 술잔을 기울였던 어느 날, 대표가 일에 가진 열정, 일에서 얻는 행복과 성취감을 듣고는 그런 열정이 우연히 피어날 거란 꿈도 접었다.


그날 대표님은 몸을 못 가눌 만큼 드시고도 다음날 아침 멀쩡히 외부 일정을 수행하셨다. 이 역시 나를 질리게 하는 부분이었다. 아, 여긴 나랑 안 맞는 업계다.


난 살면서 어떤 일에도 열정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런 처지가 낯설지 않다. 인생의 대부분 다른 이의 열정에 기꺼이 휩쓸리며 살았다. 열정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도 충분히 재밌었다.



휩쓸려간 장소에서 만난 불꽃.



생각도 않던 공모전을 나가보고, 해외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이런저런 소모임을 조직해 봤다. 그렇게 휩쓸리다 졸업을 했고, 지금은 대표의 열정에 휩쓸려 일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직장 생활은 조별과제도, 공모전도 아니다. 휩쓸리기만 해서 하기엔 너무 힘든 요소들이 많다. 친한 동료들의 퇴사도 그중 하나였다.


1년이 가까워지며 이런저런 이직 제안을 받기 시작하고, 더 늦기 전에 워킹 홀리데이를 가겠다는 지인들이 늘어나며 직장에서 휘휘 돌기만 하던 내 속도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러다 일에 대한 뜻과 열정을 찾기만 해도 바쁜 내게 매우 개인적인 시련이 찾아왔다. 가족도 연루되지 않은 너무나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나는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이랄 곳이 없었다.


“김 대리님은 어느 방향 지하철을 타세요?”

하면 태반은 나도 모를 때가 많아, 언제나 회사 근처에서 약속이 있는 척을 하거나 그때그때 답을 지어냈다. 회사 사람들 반은 내가 강북에 사는 줄 알고 나머지 반은 내가 강남에 사는 줄 알 거다.


퇴근 후 푹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일상에 안정감을 주는 요소가 회사 밖에 없는 미친 일상이 계속됐다. 회사 외에 심리 상담 일정을 추가해 심리적으로나마 일상을 안정화해보려 노력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차 말씀하셨다.


집이 없으니 회사에서의 크고 작은 갈등은 내게 생채기조차 주지 못했다. 언제든 쉴 수 있는 곳이 없었던 당시 나에게 ‘열정’은 뒷전이었고 오직 ‘안정’이 중요했다.


다행히 꾸준히 일해온 직장이 있고, 벌어온 돈이 있어 나는 여기저기 전전하며 우정 테스트 급의 이동 생활을 한 지 1년이 되기 전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


그때부터 내게 ‘일’은 홀로 존재하지 않게 됐다. 내 안정을, 내 ‘홈’을 지키는 하나의 수단이 된 것이다.


내게는 이 일로 돈을 벌어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어느 순간 일의 단독적인 의미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내 일상의 안정을 뒷받침해 준다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일이든 하리.



일상의 한 모습.




...



김서
-글로벌 홍보 업계 2년 차
-특기 : 끌려다니기 (이 프로젝트도 끌려와서 함..!)
-장기 : 열정 없어도 열심히 하기


이전 04화 무능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