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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Nov 18. 2024

인간의 옷, 미생물에게는 무한의 우주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 아마 독자들은 대부분 의복을 환경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병원균에게는 그러하다. 세균에게는 체액 한 방울이 바다와 같고, 머리카락 한 올이나 손톱 한 조각은 대륙과 같으며, 천 한 조각은 우주와도 같다. 장신구들도 체외 기생충, 즉 몸속에 살지 않고 체표에 사는 병원체들에게는 하늘과 마찬가지다. 옷이 최소한만 가리는 열대 지역의 형태에서 일 년 내내 온몸을 덮는 것으로 바뀌게 되자, 작은 생명체들의 새로운 서식지가 생겼다.

창세기에 따르면 최초의 옷은 아담과 이브가 알몸을 가리려 꿰매 입은 나뭇잎이다. 실제로 처음 옷을 입은 사람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독창성 덕분에 인간은 최초로 진화했던 따뜻한 환경을 벗어나서도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옷과 불 덕택에 인류는 전 세계, 심지어 사막과 극지에서도 사는 유일한 영장류가 되었다. 그 대가의 일부는 벼룩, 이, 빈대였다.

- 아노 카렌, <전염병의 문화사>, 권복규 역, 사이언스북스, 171~2

이런 방대한 내용을, 상당히 일목요연하고도 지루하지 않게, 아니 흥미진진하게 저술하려면 대체 어떤 이력의 공부가 필요한 것인지 궁금해서 몇 번이고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았지만 저명한 과학저술가이자 교육가라는 설명이 전부라 아쉬웠다. <우주의 구멍>을 쓴 콜 씨처럼 아노 씨도 주어진 정보와 최신 출판 정보가 없는 것이 섭섭하다. 동물 실험에 대해 지나치게 냉정하게 쓴 것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인상이다) 인문사회과학의 통섭이라는 측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책이라는 생각마저 든 책이다.

이 책의 리뷰를 쓰는 것도 꽤나 망설여졌는데 인용하고 싶어서 접어놓은 페이지가 많아도 너무 많으면 리뷰를 쓰기가 꺼려진다. 일단 아무 데나 펼쳐서 나온 곳부터 인용하자는 마음에 펼쳤더니 위에 인용한 페이지가 나와서 일단 냅다 썼다. 써놓고 보니 계절과 어울리는 인용이라 마음에 든다. 상상해 보라. 만원 지하철에 초밀착되어있는 사람들의 두터운 겨울옷과 머플러 혹은 모자, 그리고 가방, 그리고 인간의 기생생물들. 요즘 괴로운 생각이 들면 인자한 미소를 짓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는데 이 책을 읽으며 미소를 얼마나 자주 지었는지 모른다. 아아, 이 인간들아! 나부터 죽어야지 누굴 원망한단 말이냐며 요상한 반성과 탄식을 반복하며 읽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비롯된 전염병으로 인한 대학살, 현대의 인간들이 전염병을 극복하겠다고 무수히 희생시킨 실험동물들에 대한 부분들을 읽을 때 이런 증상이 두드러졌다.

…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 수는 미국에서만 55만 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사망자 수의 10 배이다.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들도 많았다. 아마 실제 사망자 수는 65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인도처럼 참혹하게 황폐화된 나라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그저 추정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중략) 하지만 인플루엔자는 불과 6개월 만에 그 수의 2배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흑사병조차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신속하게 죽이지는 않았다.

우리가 이 엄청난 독감 재앙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대중의 공포가 그토록 적었고, 그 감염 경험이 역사에 아주 가벼운 흔적만을 남겨놓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놀랍다. <미국의 잊힌 범 유행병>이라는 앨프레드 크로스비의 저서 제목은 매우 적절하다. (중략)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할아버지 시대에 있었던 최악의 대 몰살보다 중세의 흑사병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위의 책, 222~3

이 대목은 전염병 자체보다 사회심리학적인 흥미를 유발한다. 나도 이 이유가 너무 궁금하기 때문에 저자의 분석을 기대하며 읽었는데 ‘당시 사상 최악이었던 전쟁의 잔인함과 광기가 이 범유행을 가려버렸다’는 크로스비의 설명 외에 저자 본인의 분석을 더 남겨놓지는 않았다. 이 부분이 흥미롭게 느껴진 이유는 이른바 ‘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잘 드러나있기 때문인 것 같다. 최근 ‘위대한 수업’에 출연한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은 ‘재앙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는데, 파국을 예고하는 재앙적 사고, 재앙적 전망이 사람들의 감각을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어차피 지구온난화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간들은 곧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굳이 탄소를 줄이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비약된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구가 현재의 10퍼센트로 줄어든다고 해도 그것은 ‘절멸’이 아니다.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의 ‘끝’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결국 그건 일종의 허상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저 끝의 재앙보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뜬금없긴 한데, 질병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독감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독감뿐인가? 자살로 죽는 사람은 더 많고,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여성의 수는 나날이 늘어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 소식을 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끔찍한 재앙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핵전쟁이라든가 북한의 도발, 기후 위기, 3차 대전을 더욱 현실적으로 걱정하는 것 같다. 먼 곳에 있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걱정을 하지만 당장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무감각해지는 것, 아노 카렌의 책에서의 사람들의 반응과 현재 한국인들의 반응은 상당히 닮아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고 하면, 그레이엄 하먼이 제시하듯 재앙적 사고에서 벗어나 ‘지금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 모든 것에 전제되어야 할 일로 보인다. 재앙적 사고가 결국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로부터 벗어나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사람들에게 왜 중요한지 더욱 납득이 될 것이다. 북한의 문제이든 정치의 문제이든 환경의 문제이든 간에 발을 딛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노 카렌에서 시작해서 그레이엄 하먼으로 끝나는 이상한 궤적을 그리는 리뷰가 되고 말았는데, 이 책은 1995년에 출간된 비교적 옛날 책이지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미생물학에 관심 있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수작이다. 그리고 책이 쓰인 시대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현대의 팬데믹을 매우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기도 하다. 음.. 독감과 코로나의 계절이 도래했으니 모두들 개인위생에 철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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