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이스 <해부학자>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완전히 다른 책이다. 유명한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그 ‘그레이 해부학’을 쓴 ‘헨리 그레이’에 대한 지적이고도 유쾌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그레이 해부학’의 위대한 삽화가인 ‘헨리 벤다이크 카터’의 일생을 주로 소개하고 있고 (헨리 그레이는 요절한 데다 남아있는 자료가 너무 없기도 한 모양이었다),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처럼 유쾌하지 않다… 유쾌할 수 없다.
… 공식적으로 스티브는 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사망 선고를 받았다”니, 그 얼마나 기이한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마치 커다란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공표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사실 이것은 담당 의사와 나 자신 사이에 이루어진 말 없는 의견 교환 쪽에 더욱 가까웠다. 의사는 바퀴 달린 들것의 머리 쪽에 있다가, 스티브의 발을 붙들고 있던 내 쪽, 그러니까 들것의 반대쪽으로 다가왔다. 의사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이미 다 알린 다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속삭이다시피 자기 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미 땀투성이가 된 인턴은 심폐 소생술을 중지했다. 간호사가 인공호흡기를 떼어냈다. 그것과 함께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고, 안에는 나와 스티브만 남았다.
(중략)
그 순간만큼은 해부학 수업 시간에 배운 것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 전혀. 해부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스티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처럼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을 견디거나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해부학 수업에 있어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종강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말 그대로.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실습실에 있을 때보다도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던 것이었다. (중략) 나는 인체의 ’구조‘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었다. 살과 뼈와 피의 원래 그대로의, 그리고 유기적인 본성을 말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시체로부터는 죽음에 관해 배울 수 없다. 시체를 직접 해부해 보고 나서야 인체에 관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경험해 보고 나서야,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죽음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 빌 헤이스, <해부학자>, 박중서 역, 사이언스북스, 394~5
저자는 <그레이의 해부학>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한 후 그레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다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그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 그리고 삽화를 그린 헨리. V. 카터(이하 헨리 카터)가 남긴 제법 방대한 일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헤이스 씨가 헨리 카터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단 <그레이의 해부학>의 거의 유일한 관련 자료를 남겼기 때문이지만,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갈등과 일종의 어려움을 겪었던 자신의 삶과 겹쳐 보이는 부분들을 찾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이스 씨는 헨리 카터의 일기를 읽어나가는 동시에 해부학 수업을 듣는다. 책은 과거의 자료를 통해 그레이 해부학이 탄생하게 된 19세기 영국 의학계와 헨리 카터의 삶(에 그레이의 삶을 약간 곁들인) 부분과 헤이스 씨가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과 함께 해부학 실습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이 교차로 전개된다. 제법 흥미롭지만 읽어나갈수록 애초에 기대했던 것과 다른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제목이나 소개 글을 읽고 더 전문적이고 덜 사적인 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해부가 끝난 뒤에 그려진 그… 어느 정도 미감이 느껴지는 헨리 카터의 삽화 같은 책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해부란 그런 것일 수가 없다. 오감을 통해 내가 칼질을 하고 있는 대상이 죽은 시체라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하며 (인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손가락 끝을 통해 육체란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진 축축한 덩어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며, 모든 해부가 끝난 후에 장기들을 분리수거하는 과정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헨리 카터의 삶 또한 그가 원하고 계획했던 방향과 조금씩 격이 벌어지고 표류하게 되는 과정은 여간 질척거리는 것이 아니어서 안쓰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지치는 기분이 들 정도다. (헨리 그레이가 헨리 카터에게 큰 잘못을 한 번 하는데, 현대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 매우 분개하며 읽었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동안 살아있었고, 함께 자료 수집을 다니던 그의 오랜 연인 스티브의 죽음으로 수렴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글로 이 책의 정체성을 더더욱 모호하게 만든다. 하지만 스티브의 죽음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싶은 빌 헤이스 씨의 마음을 이해한다. 너무 잘 이해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처음부터 스티브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역시 이해한다. 하지만 읽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 상반된 나의 마음이 이 책의 리뷰를 미루고 미루다가 쓰게 된 이유이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가을의 (털 밀린) 고양이들
이 책은 여러모로 조지 존슨의 <암 연대기>를 떠올리게 한다. 자료 수집과 개인사 혹은 개인적 체험을 교차로 편집해서 보여주는 형식이라든가 파국에 가까운 에필로그까지 유사한 점들이 있다. <암 연대기>는 존슨 씨의 아내가 암 투병을 하는 이야기이고, 결국 암을 극복해 내지만 둘은 이혼했다고 한다는 결말에서 멈칫하게 된다. <해부학자>는 연인의 죽음으로 사실상 둘의 사랑은 완성되고 봉인된다. 둘 중 어떤 것이 더 슬픈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할수록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부학자>의 에필로그를 보며 나는 역시나 마리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가를 축였는데, <암 연대기>와 같은 결말은 상상할 수 없다. 나의 고양이들과 서로 감정이 식어서 이별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인간사-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다룬 인간사-는 <암 연대기>에 가깝다. 하지만 동물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일방적으로 반려동물을 유기하고 파양 하는 쓰레기들은 예외로 한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스티브처럼 느닷없이 아프고 갑자기 떠난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그 충격은 매 순간 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절대 자리를 내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내가 너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사랑했노라, 말할 수 있는 일종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승리이자 패배이기도 하다. 나는 <암 연대기>의 결말을 더 좋아하지만 나의 글쓰기는 <해부학자>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산뜻하게 시작해봤자 결국은 모든 것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수렴되는 축축한 늪에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