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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Oct 24. 2024

함부로 행복을 느끼지도, 슬픔을 느끼지도

영화 <다가오는 것들>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은 시간에 대한 영화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시간의 존재를 절감하는 때가 온다. 소중한 존재를 잃는다든가,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가, 돌이킬 수 없는 노화의 과정을 겪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주인공 나탈리는 남편이 다른 사랑을 만나 자신을 떠나고, 연로한 엄마가 차근차근 단계를 거쳐 결국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쓴 철학 교과서가 시장에서 퇴출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당연히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 마냥 다가온다.

나탈리는 이 모든 과정들을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엄마에게 나탈리는 좋은 자식이다. 밥을 거부하는 노모에게 초콜릿을 권하고 그걸 먹는 엄마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그 모습이 자신에게 다가올 다음 단계라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나탈리는 이미 많은 변화들을 겪고 있다. 새로운 교과서에 자신의 교과서가 자리를 내주게 되었지만 담담하다는 말도 겉치레처럼 느껴질 정도로 받아들인다. 삶을 통해 변혁을 꾀하는 자신의 제자가 나탈리의 정치적 수동성에 문제를 제기할 때도 크게 반박하지 않고 비판을 수용한다. 나탈리는 그렇게 흘러간다. 마치 오후 4시가 지나면 5시가 오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나탈리 앞에는 앞으로도 많은 것들이 다가올 것이다. 40대가 가면 50대가 오고, 50대가 가면 60대가, 또 그 이후의 삶이 다가오듯이.

그렇게 담담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변화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던 나탈리가 영화 속에서 딱 한 번 서럽게 우는 장면이 나온다. 제자가 있는 파리 교외의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엄마의 유족인 고양이 판도라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을 때다.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 상실감과 슬픔은 행복을 느끼는 순간 가장 무섭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남편과 엄마가 떠나간 자리에 손주의 존재가 채워지고, 의외의 위로를 주던 애물단지 판도라는 (의외로) 제자 커플에게 입양을 보낸다. 교과서는 퇴출당했어도 수업은 계속된다. 루소, 왜 루소일까, 나탈리의 계몽주의적 성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유행하는 철학의 광풍에 흔들리지 않는 프랑스 고전 철학의 근간에 대한 믿음? 파스칼도 루소도 이 영화에서는 마치 시처럼 서정적이고도 낭만적으로 나탈리의 공허한 삶을 채운다. 글과 영상이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섞여 어울리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직시하는 의젓하고 우아한 주인공의 모습이 아무래도 새롭게 다가오는 인생의 순간들을 견뎌야 하는 주인공과 동년배의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영화다. (그 부분이 사실은 좀 마음에 걸렸다. 그 노림수에 낚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면서도 이미 낚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서글픔 ㅎㅎ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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