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았던 위로를 주는 책

셔윈 눌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by 유월의쥰

… 말기에 들어 필의 몸무게는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중략) 한창때 46호 사이즈의 옷을 입던 건장한 사람이 이제는 겨우 63킬로그램이 나갈 만큼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산책만큼은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강박관념에 싸인 사람처럼 필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의 걸음걸이를 늦추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가만히 서 있을 수조차 없을 만큼 약해진 체력으로도 필은 병실 주변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지칠 대로 지쳐 쓰러질 정도가 되어야 재닛은 간호사와 힘을 모아 그를 의자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게 의자에 일단 앉고 나면 필은 항상 좌우 옆으로 기울어졌다. 앉아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의자 등받이에 필을 묶어둬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필은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허리가 의자에 끈으로 묶여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그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산보할 때와 같은 동작이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행동일 수도 있었고, 내면에서 뭔가가 알츠하이머 질환이 마지막 국면에 다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반사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 셔윈 눌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명희진 역, 세종서적, 158~9

<몸의 지혜>로 이미 한 번 소개한 바 있는 외과의자 의학저술가인 셔윈 선생은 이 책에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과 과정을 훌륭한 묘사와 함께 설명한다. 책의 제목은 ‘사람’이라고 한정 지어놓았지만 죽음의 양상은 다른 포유류 동물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다. 특히 반려동물의 죽음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지켜본 그들의 마지막 모습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가족 중 세 명의 죽음을 지켜봤다. 십 대에 지켜본 할머니의 죽음, 입원 중인 병원에서 맞이하게 된 마리의 죽음, 그리고 모든 죽음의 과정에 내가 모두 개입해야만 했던 소피의 죽음이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죽음에 대한 설명 중 일부다. 책에 묘사된 모든 죽음이 가슴을 울렁이게 했지만 특히 내가 겪은 죽음들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에서는 머릿속에 당시의 모든 상황들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 계속 쉬어가며 읽어야만 했다.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뇌질환과 노령성 알츠하이머를 갖고 있던 소피도 끝도 없이 걸었고, 마지막 몇 주 동안에는 제대로 서있기 힘든데도 한자리를 빙빙 돌다가 넘어진 후에도 강박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다가 발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동안 돌고 나면 지쳐서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소피의 배에 손을 받쳐 계속 걸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중에 팔이 너무 아프면 소피가 입은 옷의 위쪽을 붙잡아서 지탱했다.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소변을 볼 때는 꼭 제대로 포즈를 취했고, 소변이나 대변을 함부로 지리는 일이 없었다. 죽기 일주일 전쯤부터는 발바닥 패드의 조직이 상해서 피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발작이 일어나거나 걸으려고 한다고 마냥 걷게 둘 수도 없었다. 포대기로 싸서 꼭 안아서 진정시키거나 푹신한 요람에 눕힌 채 다리를 허우적거리도록 두기도 했다. 하지만 효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결국 발바닥에 거즈를 감싸서 걷게 하거나 잠잘 때 계속 약을 발라주는 식으로 타협해야만 했던 것이다.

정말 이유가 뭘까? 셔윈 씨가 써놓은 것처럼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는 행동? 아니면 도망치려는 반사작용? 아직도 왜 그렇게까지 걸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죽어가는 뇌의 무엇이 몸을 그렇게 혹사시키라는 명령을 반복해서 내리는 걸까. 위의 필 씨도 그렇고 소피도, 그렇게 죽어라 걸으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돌보는 입장에서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그게 그저 발작이라고만 들었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막판에 이르러 ‘진짜 발작’을 보고 나니 계속 걸으려고 하는 것이 발작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 그가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뻤다. 남편이 죽었다는데 기뻐하다니 끔찍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실제로 나는 그가 그런 추악한 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행복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전혀 모르고 숨을 거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 사랑했던 사람이 그토록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로 참기 힘들었다. 필의 사망 소식을 전화로 통보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의료진들은 그를 마지막으로 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단연코 싫다고 했다. (…) 나로서는 눈을 감은 필의 얼굴을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필을 위해서였다.

-위의 책 160

필의 아내가 쓴 (구술?) 글에 나는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소피가 내 품에서 폐에 차 있던 물을 토해내며 마지막 숨을 내쉬고 그대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슬픔과 같은 크기의 감사함을 느꼈다. 소피의 죽음의 과정은 밤을 꼬박 새워 진행되었고 그것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익사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그 작은 몸이 견뎌야 했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바로 차오른다. 그래서 소피가 죽었을 때 나는 바로 소피의 눈을 감기고, 그 앞에 감사의 절을 했다. 너무나도 평온해진, 온전해진 모습에 안도와 기쁨마저 느껴졌다.

한편으로 저 글은 마리의 죽음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소피와 달리 병원에서 cpr을 받다가 죽은 마리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도 참혹해서 죽기 바로 전까지도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마리를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그 밤에 바로 마리를 화장한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처음으로 이해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나는 죽은 마리의 모습을 도저히 오래 두고 볼 수가 없었고, 집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마리를 위한 것이었다. 죽기 몇 시간 전, 마지막 인사를 하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오래 눈을 마주하던 마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은 여전히 후회스럽지만 그날 밤 서둘러 마리의 시신을 화장한 것은 더 이상 자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모습이 내 기억 속 마지막 마리의 모습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도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믿기지 않은 마지막 모습의 잔상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아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마리를 떠올리면 살아생전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임상적인 죽음은 가끔씩 그 본래의 의미에 앞서 단말마적인 국면일 때 선고될 수 있다. 임상의들에게 단말마의 고통이란,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생이 원형질로부터 빠져나가는 순간을 의미한다. 죽어가는 환자야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보통 ’단말마의 고통‘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마지막 몸부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산소 결핍으로 인한 근육 경련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죽지 않으려고 마지막 사력을 다하는 모습은 마치 원초적인 본능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강렬한 저항처럼 보인다.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 영혼을 향해 일으키는 분노라고도 할 수 있다. 몇 달, 아니 몇 년 동안이나 질환으로 고통받고 시달려왔으면 떠날 준비가 되었을 법도 하건만, 우리의 체조직은 영혼과의 결별에 끝끝내 저항하고 화를 낸다. 단말마의 고통이 마지막에 이르면 호흡이 중지되거나 아주 높게 심호흡을 하는 상태가 되면서 무의식이 함께 찾아온다. (중략)

생을 잃어버린 얼굴은 무의식 상태로 들어간 얼굴과는 완전히 다르다. 심장이 박동을 멈춘 후 몇 분만 지나면 얼굴은 죽음의 빛이 완연한 회백색으로 변하는데, 이전에 시체를 전혀 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조차 확연하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사체의 형상을 띤다. 몸에서 정수가 빠져나간 뒤의 육신은 마치 바람 빠진 타이어 같다. 사체는 사망 후 몇 시간 내에 수축되어 거의 본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어든다.

-위의 책 185~6

할머니의 죽음은 아주 오랜 시간 예견되어 왔고, 남들이 호상이라 부를 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모진 시집살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마지막 나날들은 엄마의 손에 의해 깔끔하게 유지되었고, 그 손길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아빠와 엄마, 언니와 나 외에도 임종을 도와주는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고, 우리는 울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소피보다 더 짧고 더 평화로웠지만 호흡을 멈추게 되는 양상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의 육체는 인용문에서의 묘사와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키가 상당히 크셨고, 늙어가며 등이 거의 기역 자로 굽었기 때문에 키도 반으로 접히다시피 했는데, 죽음의 순간 접혀있던 뼈와 근육이 이완되며 쭉 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청소년에게 매우 놀라운 광경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왜곡은 있을지언정 잘못된 기억은 아닐 것이다. 허리가 굽기 전의 큰 키와 얼굴 골격을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할머니의 죽음은 마무리되었고, 잘 참고 있던 아빠가 어머니라고 외치며 오열하는 바람에 우리도 다시 따라 우느라 그 놀라운 변화가 계속 유지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책에서 설명하듯이 몇 시간 내에 수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몸을 짓누르던 모든 고통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기적처럼 회복하는 듯한 모습은 저 위에 묘사된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는 소피의 죽음에서도 느낀 것이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죽음이 나는 마냥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뭐야, 우리 할머니 죽으니까 키도 크고 쫌 멋있어…라고 생각했을 지도. (나는 철없다 못해 거의 반쯤은 미쳐있는 상태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 “모든 희망이 다 날아가버렸을 때, 꺼져가는 생명을 희미한 그림자로나마 지켜주는 것은 오직 과학적인 의료장비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한 죽음을 잠시 연기해 줄 수 있을 뿐, 오히려 고귀한 생명을 우습게 만드는 불필요한 의지이다.”

여기서 빈 박사가 말한 ‘불필요한 의지’란 생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과학적인 생명 유지 장치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다. 최후의 승리는 항상 자연이 거두게 되어 있는 섭리를 억지로 외면하려 하는 인간의 총체적인 저항을 뜻한다. 이런 의지야말로 ‘기대감’과 반대되는 ‘근거 없는 희망’이다.

-위의 책 326

사랑하는 존재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다. 인지부조화를 겪게 될 정도다. 마리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마리를 옮겨줄 친구까지 부른 바로 그날 마리는 기존의 병원에서 죽었다. 마리가 죽기 며칠 전부터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시작했고, 그 두통이 마리가 죽는 순간까지 지속되다가 죽은 이후 깨끗이 사라진 것은 내가 겪은 인지부조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상태를 눈치챈 수의사는 마리의 마지막 구개 호흡을 보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굳이 cpr을 실시했다. 내가 여전히 그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는 내 품에 마리를 안겨주든, 아니면 그 순간 마리와 함께 있으라고 말했어야 했다. 끝까지 마리를 살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내게 의사로서 윤리를 지켰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내 근거 없는 희망에 함께 춤을 춰주었다. 아무짝에도 필요 없고, 오히려 마리의 죽은 육신을 모욕한 전기 충격은 직후에 받은 영수증의 마지막 칸에 비용으로 청구되었다.

마리의 죽음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풀지 못한 숙제다. 마리의 동공이 확장되고 개구 호흡을 하던 그 순간 내가 소리 질렀던가? 우리 마리 좀 살려주세요,라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의사가 동공에 불빛을 비춰보고 고개를 가로젓던 것까지만 기억난다. 누군가 헛된 희망을 갖고 마지막까지 발악을 할 때 나는 그에게 이제 포기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커피와 쥰을 보며 나는 그들만큼은 고통 속에 보내지 않겠다고 늘 생각한다. 지난 죽음들이 내게 일종의 교훈을 주어 바른 선택으로 이끌 수 있을까? 죽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보내든 후회와 회한이 남을 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나 또한 그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