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
“이제 슬슬 대상을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밝았어!” 부산스럽게 커피를 내리던 그것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이제 겨우 이틀 남았다고. 내일이 지나면 나는 떠나. 마음은 정한 거야?”
“그게, 나는 침을 삼켰다, 대상이 꼭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거죠?”
그것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히죽거렸다. “어디 들어나 보자. 인간이 아닌 복수의 대상이 뭘까?”
“시간.” 나는 그가 이미 알고 있을 대답을 담담하게 내놓았다.
“시간.” 그것이 확인하듯 반복했다. 시간.
“네. 시간이에요.”
“시간에게 어떻게 복수를 하게?”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게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하고요.”
“이유가 뭐야?”
“시간이야말로 제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으니까요. 시간은 심지어 제 기억들마저 앗아갔어요.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 저 자신 말고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모든 인간들이 시간에게 복수를 해야 할 텐데? 무엇보다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그걸 원해?”
“대충은 예상하고 있어요.”
대충이라. 그것이 의자에서 등을 떼고 몸을 세웠다. “인간은 시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어. 즉 넌 사실 너 자신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요구를 하고 있어.”
“그것도 알고 있어요.”
“그래. 처음부터 그럴 것 같았지. 넌 그들처럼 명민하지는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은 데가 있긴 했어.”
“‘그들’이 누군데요?”
“네가 처음이 아니야. 그런 식의 부탁을 한 것은.” 시간이라는 답을 들은 후로 내내 날을 세우고 있던 그것이 한참만에 팔짱을 풀고 다시 몸을 편히 늘어뜨리며 대답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너와 같은 부탁을 한 사람들이 몇 있었어.”
“이 일을 하기도 전에?”
“그래.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아주 한참 전이지.”
“그래서 오랜만에 접한 인간이라고 표현했군요.”
“시간을 벗어나 보고 싶은 이유는 뭐야?”
“죽기 전에 시간의 차원에 갇혀 사고하는 한계에서 한 번이라도 벗어나 보고 싶어서요. 가끔 숨이 막히거든요.”
“이상한 일이네. 인간들은 시간에 구속되어 있는 것을 느끼는 게 불가능할 텐데.”
“예전에도 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면서요.”
“있었지. 그들은 좀 특별했어. 네가 평범한 것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사고의 방식이 남들과 달랐거든.”
“그들에게는 기회를 주었나요?”
“그랬었지. 사실을 말하자면 시간에서 벗어난 듯한 환상을 느끼게 해 준 것에 가까웠어. 그런데도 그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했지.”
“어떻게 되었는데요?”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경험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 인간의 지각으로는 그 감각을 스스로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건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선 것이라서 말이야. 누군가는 꿈을 꾼 것처럼, 누군가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누군가는 아예 그 경험을 기억에서 지워버렸지. 하지만 그들의 의식 깊은 곳에는 남아있었어. 그들이 원한 것과는 한참 다른 결과였지. 그들이 그걸 원했을 때는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니까. 시간을 벗어난다는 개념은 인간의 언어로 해석되지 않거든. 돌아오면 별 수 없이 시간에 갇힌 존재일 뿐이니까 그것을 벗어난 상태를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거야. 그나마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인간은 네 명 정도 있었어.”
“불가능한 것은 아니군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살다가 죽었어. 그 경험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이 불행하게 살다 죽은 것만큼은 사실이야.”
“카페 가실래요?” 나는 느긋하게 그것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좋지.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 보이는구나.” 말하기 좋아하는 그것이 다시 밝게 대답했다.
그것과 나는 집 근처 카페의 테라스에 앉았다. 유난히 볕이 따뜻한 초겨울이었다. 그것은 뜨거운 검은 커피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미하고는 얘기를 시작했다.
“내게 처음으로 그 부탁을 한 자는 사제였어. 지금 이탈리아라고 부르는 지역의 수도자였지. 그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 당시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더군. 그가 다른 사제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우연히 듣고 나는 그가 궁금해졌고 밤에 그의 방을 찾아갔어.”
그는 그것의 존재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대해 듣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기뻐했다. 사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우주에 대해서 그것에게 들려주었고, 사제는 그의 상상력과 통찰력에 놀라움을 느꼈다.
“당시에는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의 범위가 형편없을 정도였어. 그것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간들이 자신의 육체가 속하는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 사고하기 시작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야. 그것조차 종교적인 것에 매여있었고. 그 사제는 말이지, 그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이 바로 신 그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더군. 그는 내가 신이 보낸 전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아무렴 어때. 난 기꺼이 신의 전령이 되어 이 명민한 사제와 즐거운 대화를 계속 나누었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에게 애정이 생기게 되었어.”
사제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각으로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했다. 그것은 사제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환상을 경험시켜 주었다. 사제를 아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그것 또한 인간이 그 가상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온 사제가 미치지 않기만을 바랐을 정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사제의 반응은 그것에게조차 놀라운 것이었다.
“그 사제는 그 초월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였지. 자신의 인식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하나의 개념으로 말이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것이 내게서 두 번째 커피잔을 받아 들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신념은 사제의 신앙 이상으로 강했어. 그게 문제였지. 사제는 끝까지 자신이 경험한 초월적이고 무한한 세계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거든. 이제 그 경험은 사제의 강한 신념, 그리고 신앙 그 자체가 되었지. 종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어도 그의 이상은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대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다가갔어.”
그 사제는 자신의 사상을, 그리고 초월적 신을 알게 된 희열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했다. 불행하게도 그 시절에는 시대를 앞서간 대부분의 사상이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이단에게 주어지는 것은 죽음뿐인 시절이었다. 결국 그 사제는 감금되어 신념을 포기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나는 그가 갇힌 감옥에 찾아가서 그를 설득했어. 사제에 대한 종교재판이 있던 전날까지도 그에게 가서 제발 신념을 포기하라고 부탁했지. 엎드려 빌다시피 했어. 그가 웃더군. 신이 자신에게 마지막 유혹이라는 시험을 내리신다고 말하며, 그는 보란 듯이 소리 내어 기도했어. 자신은 신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거야. 자신에게 보여준 신의 모습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그를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게? 나는 그에게 함께 감옥에서 벗어나 도망가자고도 했어. 사제가 내게 한 마지막 부탁은, 그가 신을 위해 순교할 수 있도록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지.
결국 사제는 종교 재판을 받은 후 혀와 입에 구멍이 뚫린 채 끌려다니다 결국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어.”
“그의 부탁을 들어준 것을 후회하나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죽은 것이 내가 경험하게 해 준 그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스스로 인간의 편협한 시각의 한계를 벗어났던 자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의 확신에 힘을 실어준 것이 그토록 강한 의지를 드러내게 부추긴 건 맞을 거야.” 그것이 후회한다는 말을 에둘러했다.
“천체라든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은 같은 꿈을 꿔볼 테니까요. 잠시의 경험, 혹은 환상이었을지라도 그것의 무게가 남은 모든 인생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위로하듯 말했다.
“그게 뭐라고 인생을 걸까? 인간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그렇게 미쳐버린 인간들을 난 적지 않게 알고 있어. 사제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못지않게 불행했던 인간의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지.”
그것이 문제의 수학자를 만난 것은 사제가 죽고 몇 백 년이 흐른 뒤였다.
“그가 아직 청년이었을 때 처음 만났지. 대학의 도서관에서 공식을 써나가는 그를 만났어. 그가 써나가던 그 공식이 아주 흥미롭더군. 사제와 마찬가지로 그 수학자의 공식 역시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어. 처음에는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웠지. 사제의 죽음을 한 번 겪었으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이제 다른 생각을 한다고 가두거나 꼬챙이로 찔러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는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대신 알량한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지만.”
“혹시 2차 세계대전?”
그것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쨌든 그 수학자는 그 일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야. 그 일은 수학자가 죽고 난 다음에야 일어나니까. 그 수학자는 말이지, 정신병원에 감금된 상태로 굶어 죽었어.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반짝거리던 사람이, 날이 갈수록 점점 미쳐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지.”
“그 수학자도 당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나요?”
“그는 실재하는 무한을 지각하게 해달라고 했어.”
“실재하는 무한을 지각하다… 그게 가능한가요?”
“난 그에게 무한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한계에서 나온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했어. 그가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더니 비로소 묻더군. 시간을 초월해 볼 수 있겠느냐고. 나는 곧장 사제가 떠올랐고 거절했지. 행여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무한으로 지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아예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해줬어.”
수학자가 그런 부탁을 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수학자는 무한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는 데 있어 난관에 봉착한 상태였지만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무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이를 가는 보수적인 기성 수학자들의 공격은 거칠었고, 더 큰 좌절은 그 자신이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일에 연속해서 실패했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었다.
“수학자 역시 신을 믿는 사람이었어. 사제와 마찬가지였지만 신을 받아들이는 양상은 달랐지.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사제는 최후의 순간에 나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수학자는 끝까지 나를 신의 전령으로 확신했다는 거야.”
“사제는 당신을 뭐라고 생각했나요?”
“사제는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내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생각하게 됐어. 처음에는 신의 전령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더니 생각을 바꾸더군. 사제는 끝까지 이성의 범주 안에서 생각한 거야. 그가 꿈꾸고 상상하고 추론한 모든 것들, 심지어 신비주의조차 이성의 범주 안에 있다고 믿었지. 내가 왜 그를 좋아했는지 알겠어? 사제는 나를 자기 자신으로 생각한 거야!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고, 내가 보여준 무한의 우주를 자신의 상상으로 받아들였어. 그건 그의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어. 나는 그가 꿈꾸던 것을 단지 만들어 보여주었을 뿐이니 그의 상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그 사제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어! 난 그가 되어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 좋았거든. 내가 그를 살리려고 하면 할수록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의 욕망 정도로 치부했어.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지.”
“하… 비극적이네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반면 수학자는 내게서 신을 발견하고 싶어 했어. 그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었거든. 그에게는 기대고 매달릴 곳이 필요했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할 수는 없었지. 그의 이론은 단순한 진리를 추구하는 멋진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수학자가 성공하길 바랐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었어. 인간의 언어로 무한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어. 그게 그를 미치게 만들었지.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이론을 그 한계 안에서는 증명해 낼 수가 없으니까. 그는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꾸는 인간이었고, 그게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어.”
“수학자는 어떻게 됐나요?”
“그는 서서히 쇠약해져 갔어. 육체도, 정신도. 내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자 이상한 음모론에 매달리더군. 그것도 뭐 딱히 그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 나는 무한에 대한 그의 이론을 증명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옳은 이론이라고 말해줬어. 사실 그건 옳다 그르다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이론은 당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가까이까지 올라갔다고 말해줄 수는 있었어. 수학자는 나의 말을 신의 계시처럼 생각했고 신의 인정을 받았다고 단정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쇠약해졌지.”
수학자는 정신병원에 장기간 방치되었다. 그것이 계속 수학자의 곁을 서성였지만, 그는 더 이상 그것에게 어떤 요구나 부탁을 하지 않았다. 수학자는 침묵 속에서 오직 무한에 대해 생각할 뿐이었다. 수학자의 시간이 다 되어간다고 느낀 그것은 수학자가 떠나기 전에 그가 꿈꾼 무한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 말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래. 수학자는 아주 짧은 시간 시간을 초월하는 환상을 봤어. 이미 몇 달은 거의 굶다시피 한 그는 아마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잠시 후에 수학자는 숨을 거뒀어. 난 그가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조차 듣지 못했어. 그는 그 순간을 꿈꾸듯 음미했고, 그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숨을 거뒀어.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느낀 것이 자유였기를 바라지만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
수학자는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한대의 세계에서 숨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죽는 순간의 마지막 기억이 그가 꿈꾸었던 무한의 세계라면 그건 분명 그의 불행했던 모든 삶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가 죽은 후로 인간들에게서 떠나 있었던 건가요?”
“떠났다라. 난 시공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떠났다는 말은 불가해. 그저 인간들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접촉하는 것을 삼간 정도이지.”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접촉한 인간이 은행원이었나 보군요.”
“맞아. 복수로 한정 지으면 저런 황당한 요구를 하는 인간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 또 한 분이 계시는군. 그것이 혀를 끌끌 찼다. 얘기를 모두 듣고도 여전히 그게 소원이야?”
“네.”
“한치의 망설임도 없네?”
“오래 기다렸어요. 당신에게는 아주 짧은 순간이겠지만.”
“내게는 순간과 오랜 시간이 다르지 않아. 네가 시간을 벗어날 수 있다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그것의 말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그래요. 그걸 느끼고 싶어요.
“그걸 느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처럼, 시간 속으로 돌아온 인간들은 그 경험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해.”
“실은, 저는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
“인간은 그 상태로 살아갈 수 없어. 그건 알고 있지?”
“네.”
“죽음이 두렵지 않아?”
“저는 이미 너무 오래 살았어요!”
대답을 한 후 너털웃음을 짓다가 테이블 옆쪽 거울을 흘끔 보았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 아래 지쳐 보이는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저게 내 모습인지 이미 오래되었지.’
“흐음. 이제 보니 너 인간치고는 꽤 살았구나.” 그것이 대견하다는 듯 혹은 확인하듯 말했다.
“네. 이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 싶어요. 게다가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요. 이젠 지난 시간들의 기억들조차 저를 다 떠났답니다. 그런 내게 시간에게 엿먹이고 싶다는, 그 이상의 소원이 또 있을까요?”
어쩌면 이것이 시간이 갈라놓은 기억 속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나는 말하는 대신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좋아. 난 네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야. 지금 당장은 아니고, 내일 오후. 그때까지 네 주변을 모두 정리할 수 있겠어?”
“그럼요. 실은 정리할 것도 없는걸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너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것이 탄식하듯 말했다. 어차피 복수의 조건도 며칠 이내로 이곳에 머무는 것 아니었어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것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를 나눠본 지도 오랜만이었다. 알고 지내던 모든 이들이 이미 내 곁을 떠났다. 혹자는 늙어서, 혹자는 병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심지어 복수를 하고 싶은 대상조차 살아는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제 누구를 그리워해야 하는지, 혹은 미워해야 하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움과 슬픔이 남아있지만 그 대상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서러운 일이다. 그 삶의 끝에 만난 그것과 함께 카페를 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너무나 즐거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런 즐거움을 느낀 게 얼마만이지? 누군가와 진지하거나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그런 종류의 즐거움을, 나의 늙음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봐 주는 존재를 통해 느끼는 것 말이다.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그것과 대화를 나누는 지난 며칠 동안의 시간은 내게 남은 생이 얼마든간에 그 전부와 맞교환해버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대로,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간 시간이라는 놈으로부터 벗어나는 걸로 인생을 건 마지막 복수를 하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남은 유일한 소망이었다.
“고마워요.” 내가 불쑥 말했다. 그것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맛있는 커피를 마시러 가요.”
그거 좋지. 그것이 히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