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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Oct 06. 2023

종을 초월한 커래스

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

줄리오 토노니의 <파이-뇌로부터 영혼까지의 여행>을 읽다가 화딱지가 나서 멀찍이 던져버리고 (결국 나중에 다시 주워서 끝까지 읽음) 커트 보니것의 <고양이 요람>을 대략 이십 년 만에 다시 읽었다.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여전히 커트 보니것을 첫 순위로 꼽겠지만 막상 블로그에 보니것의 소설 리뷰를 정리한 적은 없다. 이 블로그는 아마도 어린 마리를 처음 데려왔을 때 뭐라도 남기려고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이미 커트 보니것의 소설 대부분을 읽은 후였고, 마리를 데려오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시작된 리뷰의 목록에 커트 보니것의 작품들이 포함되기에는 그의 소설들을 각 잡고 다시 읽는 일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가끔 우울할 때 <갈라파고스>의 끝 부분을 펼쳐 읽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번에 읽은 <고양이 요람>은 기존에 갖고 있던 ‘아이필드’출판사 판본이 아닌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번역해서 선보인 판본이다. (도서출판 아이필드는 지금 검색해 보니 2022년 8월 즉 일 년 전에 폐업한 것으로 나온다.) 지금은 없어진 낙산 고양이 책방에서 충동적으로 샀던 기억이 난다. (단지 제목 때문에 고양이를 주제로 하는 책방 서고에 이 책이 꽂혀있는 것이 웃기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도 이걸 빨리 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기존에 읽었던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아이필드 외 웅진 출판사나 금문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것들이다. 다시 꺼내볼 엄두가 안 날 정도의 연식을 자랑하고 있지만 어찌 됐든 절대 헌책으로 팔거나 버리지 않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책들이기도 하다. 이번에 <고양이 요람>을 읽고 나서 커트 보니것을 다시 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 들고 읽는 커트 보니것의 소설은 20대에 읽었던 그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느낌을 준다. 하긴 소싯적에 읽었던 대부분의 책들이 그럴 것이다.


​20여 년이 넘어 다시 읽은 <고양이 요람>은, 사실 예전에 읽은 기억 자체가 상당 부분 휘발되어 날아가버린지라 제대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전보다 더 웃기고, 더 슬프고, 더 불편하다. 웃기고 슬픈 것까지는 딱히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약간 놀랐다. 이는 지난 몇 십 년 간 시대가 변하고 특히 나 자신의 의식이 변한 탓일 텐데, 골골거리며 80세가 넘도록 살다가 이미 몇 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버린 작가에게 현대적인 젠더의식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여전히 대부분의 남성들이 가진 소위 젠더의식의 적나라한 수준을 까놓고 말하자면 커트 보니것으로부터 퇴보했을지언정 반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여튼 커트 보니것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어리석음을 가장 웃기게 표현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 크로즈비는 거나하게 취했고, 다정하기만 하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된다는 술꾼의 착각에 빠져 있었다. 크로즈비는 뉴트의 키에 대해 솔직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지금껏 그러한 주제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이 친구처럼 작은 친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오.” 크로즈비가 햄덩어리 같은 손을 뉴트의 어깨에 걸쳤다. “누군가를 잡놈으로 만드는 건 크기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오. 나는 여기 이 작은 친구보다 네 배나 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자들은 잡놈이었소. 그리고 작은 친구들도 만났는데, 뭐 실제로 이렇게까지 작지는 않았지만, 맹세코 정말 더럽게 작았소. 여하튼 나는 그 친구들을 진정한 사나이라고 부르겠소.”


“고맙습니다.” 뉴트가 제 어깨에 놓인 거대한 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그토록 굴욕적인 신체장애에 그렇게 잘 적응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몸서리가 쳐질 만큼 감탄했다.


”선생님은 잡놈에 대해 말하는 중이셨어요.” 나는 그 무거운 손이 뉴트에게서 치워지길 바라며 크로즈비에게 말했다.



-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 김송현정 역, 문학동네, 160



이 책에는 실뜨기 종류인 ‘고양이 요람’이라는 제목 외에도 실제로 고양이가 한 마리 등장한다. 비극적 이게도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등장하지만. 예전에는 별생각 없이 읽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는 사실 또한 덧붙여야겠다. (방치와 학대를 통해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책에서는 지나가듯 언급되지만 세상의 종말보다 고양이 한 마리의 죽음이 더욱 슬프게 느껴졌다. 그건 내가 고양이라는 종과 커래스로 묶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인간종과는-비록 내가 인간이기는 해도-그랜펄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보코논교도들은 ‘인류가 여러 무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데, 그 무리들은 부지불식 중에 신의 의지를 행한다. 그러한 무리를 커래스라고 부른다. 또한 그랜펄룬은 가짜 커래스로, 하느님이 행하는 방식에 비추어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허울뿐인 조직을 뜻한다.) 써놓고 보니 이 책이 낙산 고양이 책방에 꽂혀있던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었다.


이 책을 계기로 커트 보니것을 다시 읽어보기로 결심하고 헌책들을 수배 중인데 그나마 최근에 ‘문학동네’와 ‘푸른책들’에서 몇 권을 출간한 모양이었다. 그중 작가의 초기 단편집인 <몽키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구해서 다른 책(미치오 카쿠 옹의 책)을 읽는 틈틈이 읽고 있는데 역시나 놀랍고 당혹스럽다. 이전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단편은 <사랑은 오류>라는 제목의 포스트모던 소설선집에 수록된 <모두 왕의 말>과 <해리스 버저론>이 전부였는데, 그게 꽤나 엄선된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몇 편 안 읽은 상태라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개인적으로 커트 보니것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갈라파고스>와 <제일버드>인데 새로 출간된 것을 살지, 예스러운 번역과 허술한 제본으로 시원하게 갈라져 너덜거리는 책장을 참아가며 집에 있는 것을 읽을 것인지는 천천히 고민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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