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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Oct 06. 2023

길 잃은 갈릴레오의 정신 사나운 여정

줄리오 토노니 <파이-뇌로부터의 영혼까지의 여행>

…“만약 통합된 정보가 의식과 관련이 있으려면, 그 시스템을 어떤 식으로 나누든 간에 변함이 없어야 하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갈릴레오 선생님?”


“결정적인 절개란 가장 최소한의 절개입니다. 그 무엇보다 냉혹한 절개로써, 한 시스템 내에서 가장 약한 연결부를 끊어 가장 강하게 연결된 부분들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전체에서 가능한 최소의 정보만을 떼어낸 채, 나머지 부분이 만들어내는 정보가 가능한 한 최대치에 이르게끔 하는 것이죠.”


“훌륭합니다. 통합된 정보란, 부분들을 뛰어넘는 하나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보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보았을 때에 각 부분이라 함은 대부분의 정보가 만들어지는 곳이겠지요. 드디어 정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나타내는 기호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기호로는 파이가 마땅해요.” 앨튜리가 말했다. “무언가를 부분들로 나누는 올바른 방법인 황금 비율의 상징이죠. 그리고 최소한의 절개, 얼마만큼의 정보가 통합된 정보인지 밝혀줄 그 절개야말로 한 시스템을 부분들로 나누는 올바른 방법이겠죠. 안 그래요? 그걸 파이라 불러야 해요.”


(중략)


“정의도 내렸고 기호도 정했으니, 뭐가 더 남았는지 살펴봅시다. 매 순간 몇몇 부분들은 필시 소통하고 있어서 어떤 통합된 정보, 즉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만약 선생님의 생각대로 통합된 정보가 의식과 연관이 있다면 말이죠, 다음 이야기는 꽤나 단순해요. 의식은 양파껍질 같은 것이 되어버린답니다. 나와 내 뇌 속의 신경들을 예로 들까요, 내 뇌 속 어딘가에 내가 존재해요. 당연하죠.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에요. 선생님이 나를 한 꺼풀씩, 신경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낸다면 그때마다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 수백만 가지의 나를요. ‘어떤 부분이 덜어져 나간 나’이긴 하겠지만 모두들 어느 정도는 의식적이겠죠. 처음의 나란 단지 많고 많은 나 가운데 가장 풍부한 의식을 지녔을 뿐입니다. 하지만 줄어든 나 자신들도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야 마땅하겠죠. 단지 내가 듣지 못할 뿐, 그들도 묵묵히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줄리오 토노니, <파이 뇌로부터 영혼까지의 여행>, 려원기 역, 쌤앤파커스, 239~41


​줄리오 토노니는 의식을 그 자신의 ‘통합정보이론’을 통해 설명하기 위해 매우 독특하고도 사족이 많이 따를 수밖에 없는 방법을 사용했다. 우선 화자로 죽음을 목전에 둔 갈릴레이 갈릴레오를 내세우고, 육신과 분리되어 유영하는 그의 의식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분야의 석학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뭐 좋다. 대화법은 어려운 것을 이해시키는 데 있어 효과적이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각 장마다 주(해석)를 달아놓는데, 갈릴레오와 석학들의 대화를 분석하고 첨언하거나 뒷배경을 이야기해 주는 식이다. 그걸 작가의 입장이 아닌 제3의 화자를 통해 썼다. 그러니까 갈릴레오의 마지막 시간의 기록을 읽어나가는 제3의 화자렸다. 처음에 이 구조를 대충 이해하고도 대체 왜 이 따위로 썼는지 이해가 안 돼서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 뭘 오해하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읽었다. 자신이 쓴 갈릴레오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가상의 기록에 대해 장마다 붙어있는 주석에서 어이없어하거나 한심해하는 감정적 반응들이 돌출되는데 대체 왜 이런 어색한 쇼를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족, 사족에 대한 사족, 사족에 대한 사족에 대한 사족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토노니의 통합정보이론은 흥미롭지만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읽다가 몇 번이나 욕지거리가 나올 정도로 너저분하다. 토노니씨가 신경과학뿐만 아니라 역사, 예술, 인문, 철학 등 다방면에 해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걸 굳이 이렇게 몽땅 섞어서 과시하듯 전시하고 나열한 이유를 모르겠다. 실존인물의 이름을 유치하게 바꿔서 제시하는 것도 정말 싫었다. (인용구에서처럼 앨런 튜링을 앨튜리라고 부르는 식. 크릭을 프릭이라고 부르는 것도 너무 싫었다.)


사진과 그림, 그리고 바꿔놓은 이름으로도 이미 실존인물을 유추하고도 남는데 굳이 이름을 그렇게 유치하게 바꿔서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럴 거면 왜 갈릴레이 갈릴레오도 갈릴리 갈레오 뭐 이렇게 부르든가, 나 원 참.

안타까운 것은 이런 구조적인 결함과 짜증 나는 사족들을 걷어내고 나면 가치 있는 내용과 드라마틱한 장면, 문구들 또한 찾아볼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에 집중해서 제법 흥미롭게 읽고 있었다. 그런데 ‘17장 갈릴레오와 박쥐‘의 본문부터 짜증이 서서히 올라오다가 주석의 첫 문장을 읽고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주석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번 장은 유감스럽게도 충분히 완성되지 못했다. 의식의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반쪽짜리 이 시도는 동굴 속의 갈릴레오만큼이나 혼란스럽고, 박쥐의 비행만큼이나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261)’ 완성되지 않은 글도 토노니씨 당신이 쓴 거잖아요오.. 어차피 박쥐의 비행 어쩌고는 인간으로서 사고의 실험으로만 가능한 일인데 굳이 이런 장을 껴놓고는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이번 장은 미완성이라고 쓰는 작가의 심리가 궁금할 정도다. 대체 의도한 것이 무엇인가? 함께 안타까워해 주길 바란 것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전혀 안타깝지 않다. 충분히 짜증이 날 뿐이다.


​냉장고 털어먹기 하듯이 책장 털어 읽기 중에 걸려든 이 책을,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짜증을 억누르며 억지로 다 읽기는 했다. 이 책을 통해 파악된 토노니의 이론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졌고 때문에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필 그의 책 중 이 책이 유일하게 갖고 있던 책이라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론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설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현실화시킬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특히 형식이 복잡하고 사족이 많을수록 글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 버리기 쉽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형식이 복잡할수록 글은 고삐를 바투 쥐고 일관성을 따라가야 한다는 교훈 정도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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