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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Oct 06. 2023

미치지 않고서야

탐 스태포드/매트 웹 <마인드 해킹>

…루크 라인하르트의 1970년대 걸작 소설 <주사위 인간>에서 모든 결정을 운에 맡겼던 주사위 인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성격은 자신을 제한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습관, 일관성, 쓸데없는 반복. 따라서 지루함이 없는 사람은 사람답지 않다. 그런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 통계학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익숙한 상황에서 무엇을 할지 예측하려면 그 사람들이 지난번에 무엇을 했는지 살피는 것이 가장 유용하다. 심리학자들이 측정했던 여러 변인들 가운데 사람들의 행동과 가장 강력한 상관관계를 보인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의 과거 행동이었다.


(중략)


사람들의 이런 행동 편향은 매우 많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이것은 전에 선택한 것이 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거나 또는 그의 성격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선택이었을 때가 많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수에 관한 편향과 같은 여러 가지 정신적 편향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런 편향들이 일관된 습관과 보수적 본성을 낳는다.


추론 과정에서 생기는 편향은 경향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편향은 우리가 내리는 결론을 이쪽저쪽으로 밀치는 정신적 힘과 같다. 한 가지 힘이 완전히 지배하는 일이란 없다. 대신 여러 힘들이 늘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합리적이려고 매우 노력하기 때문에 혹시 편향에 빠져 무엇을 무시하는 일이 없는지 늘 경계한다. 또 합리적일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경우에는 적어도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매우 노력한다. 때문에 누가 나에게 같은 문제를 두 번 내더라도 그때그때 나의 다른 편향이 촉발되어 같은 문제가 다르게 느껴지는 일이 생기곤 한다.


-탐 스태포드/매트 웹, <마인드 해킹>, 최호영 역, 황금 부엉이 371~2


늘 하던 대로 하는 것은 쉽고 편하다.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변화를 꾀하려는 것보다 쉽다.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보수적인 행동했을 했을 경우 생각의 결과로 행동했다기보다 행동을 한 후에 그 이유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늘 하던 대로, 즉 몸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는 일에 어떤 실질적인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보수(와 그 반대로서의 진보)를 한국사회에 있어서의 진보와 보수의 개념과 헷갈리면 안 될 것이다. 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진보는 그 자체로 편향적이며 일관된 보수적 습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진보 일색의 환경에서 정치적 보수를 선택하는 경우를 습관적으로 편향된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선택은 일관성에서 벗어나 변화를 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혹은 슬프게도) 한국사회는 정치적 의미의 보수-진보의 의미가 일반적인 의미의 보수-진보의 의미를 거의 압살 하다시피 했는데, 이것이 정신적 편향과 강력하게 결합해서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분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인용에서처럼 ‘합리적이면서도 편향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보다는 진보진영이든 보수진영이든 각자의 진영의 편향에 휩쓸려 늘 하던 대로만 행동하는 것을 더 빈번하게 목격하게 된다. 진짜 진보의 경향을 보이는 쪽은 어디에도 없다. 루크 라인하르트의 말을 빌자면 ‘미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이미 다 미쳐버린 것 같기도 하고, 참으로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인간의 뇌와 마음을 엿보는 백 가지의 실험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챕터가 길지 않은 것이 장점이자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짤막하고 흥미로운 실험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좀 더 파고들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쉬울 것이다. 그간 읽어온 뇌과학을 다룬 교양서들의 내용과 중복되는 것이 대부분이라 내용에서 아쉽지는 않았지만 책의 초반에 제시되는 웹페이지들이 대부분 구동되지 않아서 그 부분이 크게 아쉬웠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06년, 약간 과장해서 20년 가까이 된 구닥다리 웹페이지들이 남아있거나 구동될 리가 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젊었을) 여러 연구자들이 함께 쓴 이 책은 이천 년대 초반 특유의 낙관적인 발랄함이 크게 두드러진다. (재미를 추구하는 고급 콘텐츠들이 그때만큼 쏟아져 나온 때가 있었을까 싶다.) 그때는 그냥 뭐가 다 계속 잘 되고, 음.. 나아질 줄 알았다. 말 그대로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진보가 대세라는 믿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정치사회적으로 거대한 백래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 당시의 분위기를 책에서 느끼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백래시가 쓸고 간 미래에 폐허 말고 남은 무언가가 있을까?


​약간 지루하고 산만한 책의 앞부분을 견디고 나면 상당히 재미있는 후반부의 ‘기억’ 챕터를 만날 수 있다. 카페인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그건 다음에.


사족: 제목에 쓴 <미치지 않고서야>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데, 어쩌다 보는 것들은 어쩌다가 보니 남들이 보지 않는 것들이다. 가끔 병맛드라마를 보는 것이 길티플레져이기도 한데, <미치지 않고서야>는 약간의 병맛도 가미되어 있지만 그럴듯한 직장인 판타지이기도 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식의 과정은 따르지만 끝은 창대한 판타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소리, 정재영) 이 재미난 것을 사람들이 왜 안 보는지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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