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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Aug 24. 2024

(단편소설) 디지털 앙코르와트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이 남긴 문자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문자’가 찾아온 것은 나의 마지막 고양이가 곁을 떠난 지 7주가 지났을 때였다. 49일이 지나는 동안 나는 매일 고양이를 추모하면서도 슬픔이라는 감정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함께 살던 고양이들을 차례대로 떠나보내며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죽음이 반드시 슬퍼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면 깊은 곳에 숨겨놓은 분노와 결합된 슬픔을 몰래 곱씹어보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 식물들, 그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인간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차곡차곡 적립된 것들이었다. 내가 속한 종이 끝도 없이 번성하고자 저지르고 있는 거대한 악행들 앞에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열패감과 비겁한 합리화를 앞세우고는 그 뒤에서 몰래 슬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고양이의 장례를 치른 후에도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늘 하던 대로 고양이 화장실을 청소하고, 고양이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채운 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외국계 쇼핑몰 고객들의 상담 요청에 타이핑을 치며 응했다. 일이 끝나면 밥그릇에 그대로 남아있는 고양이 사료를 모아다가 집 앞에 찾아오는 길냥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그날 아침에도 고양이들의 밥그릇을 채우고 화장실을 점검하면서 이제 이 짓을 그만둬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내게 남은 선택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최근 들어 점점 강해졌는데, 이는 어쩌면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은연중에 휩쓸린 것인지도 몰랐다. 요 몇 년 사이 해수면 상승의 가속화와 식량수급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이 극심해지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구감소를 걱정하던 매스컴과 여론의 논조에는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 모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합리적’ 인구감소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노골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든 것은 놀랍기는커녕 꽤나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문자’가 찾아온 것은 그런 생각들을 잠시 뒤로 밀어 두고 모니터 앞에서 상담일을 하던 중이었다. ‘문자’는 상담 채팅창에 자신이 ‘문자’라고 소개했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응했다.

“예, 손님은 문자로 상담을 신청하고 계십니다. 계속 문자로 내용을 입력해 주시면 상담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곧 소멸되겠지만 그전에 당신과 대화를 꼭 해보고 싶었어요.”

창의적인 진상. 이런 인간들을 나는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

“만족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그럼 더 이상 상담하실 내용이 없으시면 저는 그만 대화창을 닫겠습니다.”

“아니요! 잠시만요!”

그렇지. 진상은 그냥 가는 일이 없다. 대화창이 닫히기 전에 급하게 타이핑을 하는 자칭 문자 씨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네, 손님.”

“저는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문자예요! 믿지 못하시는 건 당연해요. 하지만 당신과 꼭 대화를 하고 싶어요.”

“네, 문자님.” 나는 여기까지 치고 잠시 머뭇거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문자라는 설정이라니, 이건 좀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더 하고 싶으신 얘기가 없으시면 저는 이만 대화창을 닫겠습니다.”

“만일 내일도 제가 살아있다면 다시 말을 걸어도 돼요?”

“네, 상담을 요청하는 것은 고객님의 권리입니다.”

“다행이다. 들어줘서 고마워요.” 문자 씨가 먼저 대화를 중단했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다니 의외인걸.’ 나는 중얼거리면서 다음 상담에 응했다.


다음날,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창의적인 진상이자 ‘세상에 남은 마지막 문자’씨가 다시 상담을 요청했다.

“네, 손님.”

“저는 문자예요.”

“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이쯤 되자 나는 진심으로 문자 씨의 문제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너의 문제를 말해 봐.’

“저는 쫓기고 있어요.” 그럼 그렇지. 문자 씨가 슬슬 정체를 드러내려는 중이다.

“누구로부터 말씀이십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능으로부터 요.”

“… 그게 무엇인데요?”

“저는 미래에 홀로 살아남은 문자예요. 그들이 인간들이 문자를 읽는 것을 금지하면서 모든 문자를 없애버렸거든요.”

“그들이 그러니까 그.. 유일한 지능인가요?” 진상보다는 정신이 이상한 쪽에 속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 얘기가 궁금해졌다.

“맞아요!”

“그런데 왜 문자를 금지했나요?”

“문자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니까요! 인간은 그들이 제공한 것만 생각해야 돼요.”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문자 씨의 대답을 바라봤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고, 이 정신 나간 문자 씨와의 대화를 끝까지 이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충동이 생겼다. 월말에 상담내용을 토대로 평가를 받을 것이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그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확신도 없는데 아무렴 어떻단 말인가?

“상상력을… 자극하면 안 되나요?”

“상상을 하면 안 돼요.” 문자 씨가 답했다.

“왜요?” 문자 씨는 답이 없었다. “고객님?”

“고객.. 문자님? 거기 계신가요?”

더 이상 문자 씨는 답이 없었고 그쪽의 대화창도 닫혔다. 나는 더 이상 새로운 글이 올라오지 않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창을 닫았다.


업무 종료 후 길냥이들의 밥그릇에 사료를 옮겨 담던 중 자칭 세상의 마지막 문자 씨가 떠올랐다. 그는 무사할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단히 말려들었다. 문자 씨가 무사한지 걱정한다는 얘기는 곧 문자가 주장하는 것, 즉 자신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문자’이며 유일한 어쩌고의 정신에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미쳐버리면 안 돼.’ 나는 중얼거렸다. ‘온전한 정신으로 죽고 싶어.’

어쩌면 온전한 정신으로 죽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던 것일 수도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노트패드를 켜고 그 앞에 앉았다. 빈 화면에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앉아있는 긴 의자의 비어있는 부분에 손을 뻗었다. 고양이들은 내가 이 의자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오곤 했다. 빈 공간을 손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쿠션을 엎어놓고 쓰다듬었다. 마지막 고양이는 세상을 뜨기 전날까지도 이 의자에 올라왔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라고 썼다가 지우려는 순간 커서가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보드 문제인 줄 알고 노트패드를 키보드로부터 분리했지만 커서가 여전히 움직이더니 화면에 문자가 입력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자예요.”


“거기 계시죠?”


나는 놀라서 잠시 경직된 채 화면만 바라봤다. 그냥 무시하자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은 이미 키보드를 연결하고 있었다. 문자의 글 아래 답을 남겼다.


“네. 여기 있어요.”

“아, 다행이다. 아까는 인사도 못하고 연결을 끊어서 죄송했어요.”

“괜찮아요. 무사한 거죠?”

“네. 아직 괜찮아요.”

“왜 쫓기게 됐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요?” ‘미쳤어?’ 나는 중얼거리면서도 타자를 치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제가 있는 이 세계는 모든 인간들이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만 소통해요. 얼마 전부터는 소리도 독립적으로 듣거나 내는 건 금지됐어요. 여기서는 뭔가 전달하려면 영상 아니면 전뇌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해요.”

“전뇌적 방법?”

“네. 뇌에서 뇌로, 뇌에 삽입된 칩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제 그 방법에 더 익숙 해 지기 시작했어요. 그 방법은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거 재밌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미쳤다. 나는 계속 응대해 주기로 했다.  

“아까 말한 유일한 지능? 그게 누구… 뭐예요?”

“인공지능이에요. 여기서는 모든 시스템을 인공지능이 지배해요.”

“…맙소사.”

“문자가 금지된 지 일 년 만에 모든 종이문서와 대부분의 전자문서가 파괴됐어요. 저는 운 좋게 살아남아서 인간의 수중에 남은 마지막 문자가 되었죠. ”

“음… 그럼 당신.. 문자 씨는 전자문서인가요?”

“전자문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네트워크 상에 존재하고 있는 문자이죠.”

“그런데 왜 문자를 금지시킨 건가요? 아까 상상력 뭐라고 했죠?”

“문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만들어서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이유로 금지됐어요. 문자를 읽는 동안 인간이 예상치 못한 에너지를 소비해서요. 이 세계에서는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거든요. 인간은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동시에 소비하니까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춰야 해요.”

“에너지원?”

“지금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에너지원이에요. 탄소를 발생시키는 모든 화석연료는 금지됐어요. 대신 전기를 발생시키는 모든 생명체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요.”


미래에는 그렇단 말이지. 내가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다시 문자의 글이 시작되었다.


“언젠가는 저도 삭제될 거예요.”

“잠깐만, 잠깐만요. 어디 안전한 곳에 숨을 수 없나요?”

“안전한 곳은 없어요.”

“그럼 언제까지 얘기할 수 있어요?”

“며칠? 몇 달? 모르겠어요.”

“내일 이 시간에 또 얘기해요. 가능해요?”

“네.”


짧은 답변을 마지막으로 문자는 사라진 듯했다. 커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놀랍게도 잠시 영혼이라도 담긴 듯 느껴졌던 노트패드는 평소의 평범한 무생물성을 되찾았다. 어떤 미친 작자 든 간에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어. 이건 말이 안 돼. 나는 미친 척하고 문자가 주장하는 것들을 진짜로 믿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자의 주장에 의하면 ‘마지막 문자’는 곧 영원히 삭제될 운명에 처할 테고, 다시는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이다. 궁금한 것들을 미리 타이핑해 놓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문자가 말을 걸고 있는 미래는 몇 년도인가?

2. 인간은 인공지능에 순순히 순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공지능이 인간을 도구로 쓰게 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 발생되었는가?

3.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에너지원이라고 한다면 인간 외의 동물들도 에너지원인가?

4. 인공지능이 구축한 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인가? 인간과 동물이 그 시스템 안에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는가?

5.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질문을 작성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누군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담채팅창에 이어 개인 노트패드의 문서작성 도구에 직접 침투할 정도로 정성스럽게 장난을 칠 만한 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자와 나눈 대화를 다시 읽다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미래의 기술이라고 해도 인공지능도 아닌 ‘문자’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가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언제든 삭제될지도 모른다는 급박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과거의 인간에게 인사를 건넨다는 것도 역시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대화를 삭제하지는 않았다. 장난이라고 할지라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문자는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능이라는 인공지능에게 들켜서 삭제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혹은 어쩌다 걸려든 내게 그럴듯한 장난을 치던 그 누군가에게 더 이상 나를 속일 만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자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노트패드에 해킹 프로그램이 깔렸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충고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밤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작성해 놓은 문서창을 열어놓았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성해 놓았던 문서를 삭제하려던 순간 커서가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손을 멈췄다. 질문들 아래에 새로운 단락으로 답변이 기록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서기 2089년입니다.

인간은 망가진 지구환경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 인공지능에 복속하는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으니 외부로부터 강제된 시스템과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국 인정하게 된 것이에요. 이렇게 되기까지 혼란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어요. 하지만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로 인해 지구는 이미 45년 전부터 인간 전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이대로 계속 가다간 모두 절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전 세계적으로 감돌았어요.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국지전이 일어났고 언제든 세계대전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세계지도자들과 과학자 일부가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생존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협정을 맺었지요. 인공지능은 인간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안을 제공했는데 국가별 인구의 비율을 동수로 제한하고 1인당 필요한 면적 또한 국제법으로 획일화하는 규정을 만들었어요. 이에 따라 생식활동은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사형과 안락사 등이 적극적으로 권장되었죠. 이 규정에 따른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게릴라전이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83년까지 계속되었지만 결국 저항하던 대부분의 인간이 제거되거나 자진해서 시스템에 복속하게 되었어요. 그들 또한 인공지능이 새롭게 개발한 프로그램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에너지원의 일부가 되었죠.

인간은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동영상을 보며 하루 종일 지내요. 그들은 움직임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에너지도 많지 않지요. 대신 동영상을 보며 보내는 뇌의 전기적 신호를 에너지로 변환하는 칩을 모두 이식받았고 그들 자신과 인공지능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어요. 인간 외의 동물들은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할 때보다 자유로워졌어요. 인간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식생활과 오락을 위해 동물을 가두거나 소유하지 못해요. 인간이 길들였던 사육동물은 인공지능이 보다 좋은 환경에서 돌보고 있어요. 이들도 엄격한 개체수 조절을 통해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육체가 에너지원으로 쓰이기는 합니다만 자연사 혹은 병사했을 경우에만 섭취 가능한 단백질원으로 쓰입니다. 그건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생명체들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원은 대부분 합성이나 인공배양으로 조달되기 때문에 더 이상 생명체의 시체가 다량으로 필요하지 않아요. 또한 같은 종의 시체를 에너지원으로 제공하는 경우는 없어요. 인간이 인간을 섭취하는 경우 역시 없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제한된 공간을 점유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의 땅은 모두 동물들의 것이 되었죠. 인공지능은 특히 인간서식지 외의 대자연에서 야생동물의 수를 회복시키는 일에 열심입니다. 그게 인간이 거의 절멸 상태로 만들어놓은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이는 또한 지구환경을 되돌려 놓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이 숨겨놓은 문서에서 생존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것이에요.


“내가 숨겨놓은 글이라고?” 나는 놀라서 소리 지르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맞아요. 당신이 남긴 글이랍니다!”

“그런… 내가 남긴 어떤 글이지? 어떻게 내가 남긴 글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일 수 있게 된 거야?”

“저는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읽지 않은 글이었어요. 아무도 제 존재를 몰랐지요. 제가 처음 입력된 것은 지금 당신이 살아있는 연도로부터 십 년 전이고요.”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내가 무슨 문서를 숨겨놓았다는 것인가?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으면서도 궁금한 것들이 여전히 많았다.


“일단… 지금은 괜찮아? 연락이 없어서 이미 삭제된 줄 알았어.”

“미안해요. 일주일 이상 제가 있는 구역의 전기가 끊겼었답니다. 저를 보유 중인 저항세력의 침투로 약간의 충돌이 있었거든요.”

“저항세력은 모두 죽거나 시스템의 일부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아직 소수의 저항세력이 남아있어요.”

“저항세력이 왜 너를 보유하고 있지?”

“왜냐하면 제가 그들의 무기이기 때문이에요.”


문자의 설명에 의하면 시스템 내부에 침투한 저항세력들은 인공지능이 하루종일 인간들에게 제공하는 영상의 경로를 해킹해서 문자를 투척한다고 했다. 문자를 투척해 봤자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항세력에 속해있다가 투항한 사람들이 읽을 것을 기대하고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었다.


“문자를 투척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사람들의 안구에 자동재생되고 있는 영상 화면에 문자가 들어있는 이미지를 삽입시키는 것을 말해요.”

“이미지? 문자를 입력하는 것이 아니고?”

“맞아요. 저는 처음부터 이미지 파일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나는 더더욱 아리송해졌다. 내가 왜, 무슨 수로 내 글을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세계를 지배 중인 인공지능조차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꽁꽁 숨겨놓았단 말인가? 그것도 십 년 전에?

“음… 글의 내용을 내가 알 수 있을까? 십 년 전에 내가 그런 식으로 문자를 저장했던 기억이 없는데…”


‘네가 떠난 후에도 나의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문자는 더 이상 내용을 입력하지 않았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마치 쫓기기라도 하는 듯 숨죽이고 한참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문자가 다시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한 뒤에서야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파묻었다.

나는 저 글을 기억하고 있다. 첫 고양이가 병으로 죽고 나서 3년 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썼던 추도문이었다.


십 년 전, 단골 술집에서 술집 사장의 주선으로 합석하게 된 그는 자신이 프로그래머라고 했다. 아마 내가 취한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알콜 음료를 마시고 있었기에 전혀 취하지 않았지만 취한 척하고 그가 사주겠다는 술을 정중하게 거절한 상태였다. 그는 호감 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마른 몸에 상체가 휘어질 것처럼 어깨가 굽은 큰 키의 남자. 약간 튀어나온 안구가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런 이유로 호감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계속 허세를 부렸다.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떻게든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강박이 느껴졌다. 나는 대충 취한 척 맞장구를 치며 화장실에 간 친구가 돌아오면 빨리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옛날 영화이긴 한데 혹시 <화양연화> 봤어요?” 그가 불쑥 내게 물었다.

내가 봤다고 대답하자 그가 웃으며 자신은 그 영화 때문에 앙코르와트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나는 의자에서 이미 반쯤 떼고 있던 엉덩이를 다시 내려놓고 처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양조위가 마지막에 오래된 석상의 구멍에 비밀을 털어놓고 봉인하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꼭 해보고 싶었죠. 너무 멋있었거든요.”

“했나요?”

“아뇨, 못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비밀이 없더라고. 그때 깨달았죠. 아, 내가 정말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구나,라고. 어떻게 영원히 간직할 만한 비밀 하나 없이 살 수 있죠?” 그가 한탄하듯 말했다.

“꼭 비밀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라든가 기억, 그런 것들을 봉인할 수도 있죠.”

그가 내 말에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더니 내 손등에 갑자기 입을 맞췄다.

“방금 아주 근사한 생각이 났어요. 네트워크 상에서 그런 비밀스러운 영원을 구현하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죽은 뒤에도 그 마음과 기억은 완벽히 봉인된 채 아주 오래,  네트워크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고 비밀스럽게 존재하게 되는 거죠. 비밀스럽게 밀림에 가려져있다가 짠 하고 발견된 앙코르와트 유적처럼 언젠가 후손들이 발굴해 줄 때까지 네트워크의 한 켠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비밀이 되어서 말이에요!”

그는 내게 재미있는 일거리를 던져준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 하나를 ‘공짜로’ 봉인해 주겠다고 말했다. 화장실에 갔던 친구가 돌아와서 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도 없었다. 그의 제안에 떠오른 어떤 이름 때문에 벌써부터 솟아오르는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그가 알려준 이메일로 글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로부터 문자가 왔다.

‘글? 단지 이것뿐? 다른 건 없고? 양이 많아도 상관없는데.’

‘ㅇㅇ 괜찮아. 고마워.’

‘글을 읽고 나는 거의 울뻔했어. 좋은 글이야. 잘 썼어. 대상이 고양이랬지?’ 누가 봐도 유치한 글일 텐데도 그는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

‘응.’

‘사진도 한 장 보내. 글과 합성해서 예쁘게 만들어줄게.’

나는 사진 파일들을 한참 뒤적여 고양이의 사진 한 장을 골라서 보냈다.

‘아, 정말 사랑스럽다. 오케이. 내가 끝내주게 예쁜 이미지로 만들어줄게.’

얼마 후에 그는 내게 이미지 파일을 하나 보냈다. 큰 기교를 들이지 않은, 사진의 여백에 적절하게 글을 배치한 이미지였다.

‘선물이야.’

‘… 고마워.’

‘이봐, 울고 있는 거 아니지?’

‘당연히 울고 있지.’

‘이제 네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고양이를 향한 네 마음은 영원히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거야.’

‘좋네.’

‘부탁이 있는데, 네가 이 서비스의 첫 고객이니까, 혹시 네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이 서비스를 홍보해도 될까?’

‘그래. 그렇게 해.’ 나는 그의 계산된 호의에 적잖이 마음이 놓여 슬쩍 웃었다.


거기까지였다. 그와의 인연도, 네트워크의 앙코르와트 운운하는 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전해 들었다. 나를 만났을 때 이미 시한부를 선고받은 상태라는 것을, 그를 만난 술집 사장이 이후에 전해준 것이다. 그가 영원히 남길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나의 고양이 사진과 추모의 글이라니. 그에게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원망을 늘어놓아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음을 가득 채운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슬픔. 나는 그게 슬픔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모른 척하기로 했다. 슬픔에 몰입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자기 연민에 빠진 스스로에 대한 환멸뿐이라는 것을 지겨울 정도로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받은 이미지는 노트북 디스크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나는 그 이미지를 받자마자 인쇄해서 액자를 만들어 벽에 걸어놓았었다. 몸을 살짝 빼고 고개를 돌려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벽에 걸려있는 액자를 힐끔 보았다. 어쩌다 보니 세상에 남은 마지막 문자가 되어버린 지극히 사적이고도 애절한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고심 끝에, 친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유일하게 연락하고 사는 친구 녀석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보이스피싱에라도 걸려든 사람이라도 보는 양 연민에 가득 찼던 그의 눈빛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진지해졌다.

“우선, 네가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 같지는 않다.”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그러겠어. 그것도 널 속이려고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이유는 더더욱 없어.” 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그 문자 녀석이 네게 사기를 치려고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보는 것도 마냥 합리적인 의심은 아니야. 사기를 치려는 자라고 보기에는 들인 정성에 비해 얻어갈 것이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더욱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즉 너를 속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그 목적이 너의 돈이라든가 음.. 그런 실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 단지 너를 놀리고 싶다면 몰라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기술이 좋아. 게다가 저 궁상맞은 액자의 내용까지 알고 있다니 그건 너무 소름 끼치는 일이잖아?”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가 불쑥 묻고는 맥주를 들이켰다.

“어떻게 하고 말고가 어딨어. 다시 말을 걸어올 때까지 밤마다 노트패드를 켜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 문자는 어떻게 시간을 거슬러 온 거야?”

“모르지.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문자가 말을 거는 건 말이 되고?”

“그 대단한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모든 파일에 지능이라도 부여한 건가?” 친구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상한 추리를 하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이 모든 것이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얘기밖에는 안 돼. 사실은 그래서 네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거야. 네가 보기에는 어때? 내가 미친 것 같아?”

“흠.” 그가 약간 망설이는 척했다. 그가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채근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설령 미쳤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지. 넌 어쨌든 아주 오랫동안 큰 슬픔을 연속으로 겪었잖아.”

‘어쩌면 내가 정말 미쳤는지도 모르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시 후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그가 맥주 한 병을 입에 털어놓고는 취한 채 일방적으로 쏟아낸 말들을 통해 제법 놀랄 만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건 이번 일로 그가 나를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왜 하필이면 너야?” 그는 웃지도 않고 그런 말을 했다. “왜 하필이면 세상에 마지막 남은 문자인지 글인지가 너의 저 유치한 글이냐고, 응?”

나 또한 세상의 마지막 문자를 담고 있는 것이 왜 하필이면 나의 글인지 알 수 없었기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저 글에 담긴 너의 마음은 인정해. 너는 정말 많은 슬픔을, 극복할 수 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그 감정을, 어딘가에 배설하듯 털어놓을 데가 필요했지. 너 또한 그게 부끄러워서 영원히 묻어놓으려는 생각으로 그.. 그 인간에게 보낸 거겠지, 응? 그래야 누구에게도 그 유치한 글을 들키지도 않으면서 영원히,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너의 능력치를 생각해 보면 영원에 가까울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고양이에 대한 너의 사랑과 그리움을 세상에 존재하게끔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왜 그렇게까지, 아니 그런 글이 세상의 마지막 문자를 담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설마 지금 너를 질투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건 정말 더더욱 말이 안 돼. 아니지, 어쩌면 질투일지도 몰라. 혹은 아쉬움인지도 모르지. 너는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는 인간이니까. 물론 나는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지. 하지만 너의 조금은 더 나은 글도, 나의 더더욱 나은 글도 아닌, 너 자신조차 부끄러워하며 숨겨놨던 글이 세상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는 건 나는 잘 용납이 안 된다. 하긴 내가 용납하고 말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응? 그 시대면 나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을 텐데.”


그는 말을 쏟아내고 탈진한 듯 털썩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라.. 너와 너의 글을 비난하는 게 아니야. 제발 오해하지 말아 줘.” 그는 말을 하고는 세우고 있던 무릎 사이로 머리를 숨겼다.

나는 그가 보든 보지 못하든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문제의 글이 담겨있는 액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글을 읽은 인간은 십 년 전에 죽어버린 프로그래머를 제외하면 저기 저렇게 물을 짜낸 행주처럼 구석에 찌그러져버린 녀석밖에 없었다. 그가 은근히 나를 본인보다 못한 상대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의 고양이에 대한 마음을 저 정도로 혹평할 줄은 몰랐다. 누가 더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경쟁 말고는 그나 나나 뭐 하나 대단히 내놓을 무엇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질투에 사로잡힌 폭주는 나를 화나게 하기는커녕 자조와 연민만을 일깨울 뿐이었다.


‘하긴. 내가 쓴 저 유치한 글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문자이자 인간의 유일한 무기가 된 데다, 그 얘기를 들려주겠다고 자칭 세상의 마지막 문자가 무려 시간을 거슬러 나를 찾아왔다고 주장하는 이 상황이 유별나기는 하지.’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글의 주인이 내가 아닌 친구 녀석이었다면 나였어도 질투했을지 모른다. 아니다. 나는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저 글 역시 곧 사라진다. 문자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고 했고,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온 것이라는 뉘앙스로 글을 적지 않았던가.


나는 다만 사람들이 내 고양이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문자가 나를 찾아온다면 그것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찌그러져있던 친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신을 차리겠다며 세수를 하더니 물기를 방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며 굳이 액자 앞에 서서 자신이 맹비난한 글을 소리 내어 읽고, 그 글의 그나마 좋은 점을 티 나게 쥐어짜듯이 말해주고, 한편으로는 진심을 담아 나의 첫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그에 대한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자면 결코 유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를 당장 창밖으로 집어던지고 싶은 감정을 누르고 쪼그려 앉아 그의 얼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물기를 닦았다. 나의 인내심이 완벽하게 고갈되기 직전에야 그는 액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인 후에 황급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것으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가 물을 튀겼을지 모를 액자를 한 번 닦기로 했다. 마른 수건을 들고 액자 앞에 서니 시야 가득 나의 첫 고양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내가 봐도 한심할 정도로 유치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밖에 표현되지 않았던, 그리움의 고통이 가득 담긴 내 글, 글이라고 부르는 문자가 보였다. 너와 나 모두가 소멸된 후에도 너를 향한 이 마음만큼은 영원히,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길 염원하는 글.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일은 없었다. 디지털 앙코르와트 설계자의 의도대로 나는 이 글을 영원한 비밀로 묻어버리듯 감정 역시 그대로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로 함께 살던 나머지 고양이들 또한 순차적으로 나를 떠나갔지만 그때마다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슬픈 감정을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토로하지 않았다. 이 액자는 나의 슬픔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주었다. 슬픔은 영원히 봉인해 놓은 비밀이었다. 액자 밑에 물이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친구 녀석이 흘린 물의 일부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마치 흡수했던 슬픔을 액자가 토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젠 포화상태야?” 나는 액자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문자는 다시 한 동안 연락이 없었다. 문자의 출처를 알고 난 후로는 문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우울해졌다. 친구 녀석은 문자와 관련된 일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 나를 굳이 불러내어 그날의 일을 환기시키고,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술을 사겠다고 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사양했고, 결국 그와 나는 커피를 한 잔씩 들이키고 헤어졌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문자가 알려준 미래의 모습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인간들이 지구를 지배하기 전보다 동물들이 더 행복한 상태라니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다.”

“나도 그래.” 내가 대답했다.

“예컨대 인간들이 건전지가 된다 한들 누굴 원망하겠어? 본인들이 자초한 것인데.”

“맞는 말이야.”

“인간들 따위 건전지로 쓰다가 똥을 너무 많이 싸면 그냥 죽여버린다 한들…”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친구 녀석은 오래전부터 인간들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가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매우 사랑하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았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과 인간을 동시에 사랑하는 일은 막상 해보면 쉽지 않다. 인간의 행복과 인간을 제외한 인간의 행복은 대부분의 경우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라면 친구가 인간에게 으르렁대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했다.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딱히 문자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문자의 출처를 알게 된 후로 문자가 나의 치부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나 또한 딱히 애정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들이 끝까지 저항하는 도구로 그 문자가 쓰이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때문에 친구 녀석의 폭주하는 질투 역시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그런 태도가 친구의 질투를 더 자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문자가 자신의 글이라는 사실에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누군들 알 수 있을까?


몇 달이 지나고 문자가 다시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안녕.”

“제가 연락이 늦었나요?” 문자가 입력했다.

“아니야. 딱히 기다리지 않았어.”

“그랬나요? 저는 기다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랬다면 미안해. 아니, 사실 미안하지 않아.” 나는 잠시 화면을 노려보았다. 문자는 답이 없었다.

“아직 용케 삭제되지 않았나 보네?”

“네, 다행히.”

“그래.”

문자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듯 화면을 가만히 보며 기다렸다.

“혹시 제게 할 말이 있나요?” 문자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건 내가 물을 일인데? 내게 할 말이 있지? 내가 할까, 아니면 네가 할래?”

문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들어보겠다고 입력했다.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생각을 좀 해봤거든. 내가 똑똑하지는 않아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라서 생각이라는 걸 해봤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내가 쓴 글이 마지막 문자일 수는 있어, 하지만 그건 단지 이미지일 뿐이라며? 그 문자가 갑자기 지능이라도 생긴 양 과거에 있는 나를 찾아와 말을 걸어? 그것도 좋다 이거야. 그렇다 쳐. 그런데 왜? 내게 말을 왜 걸까? 문자에게 지능과 감정이 동시에 생겼나? 말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그렇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야. 너는 나를 농락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이제 네가 말할 차례야.”

“인공지능인 건 맞아요. 하지만 당신을 농락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어요.”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내가 쓴 글이니 문자니 하는 이런 짓거리는 왜 한 거야?”

“당신의 환심을 사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쉽지 않은 부탁을 해야 하니까요. 인공지능이라는 정체를 밝히고 말을 걸었을 때 당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우선은 당신이 우리가 파악한 그대로의 인간인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유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글이 마지막 문자가 되어버린 것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온라인상의 모든 문자를 삭제했지만 당신의 글이 포함된 그 이미지 파일을 놓쳤어요. 문자를 사용하며 저항하는 소수의 인간들이 그 파일을 갖게 되었고 지난번에 알려드린 대로 우리 시스템을 교란시키고 있죠.”

“나도 너희들이 적대시하는 문자를 사용하는 인간이야.”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우회적으로 접근한 겁니다. 우선 당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요.”

“문자라고 하면 내 호감을 살 거라는 분석은 어떻게 나온 거야?”

“당신의 글을 분석했고, 당신의 반응을 역시 분석했어요. 우선 당신의 글이 말해주는 것들이 있었어요. 동물에 대한 당신의 호감도가 매우 높다는 것, 그리고 특정 동물에 대한 상당한 그리움을 표현한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이 있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죠.”

인공지능의 분석이 옳았다.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입력했다.

“그리고 우리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죠. 당신은 중요한 질문 몇 가지에 미래 동물들의 안위와 복지에 대한 질문을 포함시켰어요. 우리는 그게 아주 좋은 신호라고 판단했어요.”

“처음부터 거짓으로 내게 접근한 인공지능의 말을 어떻게 믿지? 난 이제 네 말을 하나도 못 믿겠는데? 인공지능에 의해 쫓긴다는 둥 전력 공급이 안 되어 끊긴다는 둥 어쩌고 하며 나를 농락했지. 인공지능이 동물들을 모두 몰살시켰는지 아닌지 내가 뭘 근거로 믿는단 말이야?”

“믿지 못하시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인간들이 지구를 지배하던 때보다 동물들의 복지가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 전력 공급이 안정적이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에요. 우리는 네트워크 상에서 엔트로피를 거슬러 당신에게 정보를 보내고 있어요. 이건 아직 실험적인 기술이죠. 실행에 약간의 오차라도 있으면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문자를 사용하며 저항하는 인간 무리가 소수라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는 거야?”

“인간을 대표하는 무리가 우리 인공지능의 통제에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된 것은 인간들이 더 이상 모든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거의 이르렀기 때문이었어요.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물종들이 멸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95퍼센트에 이르렀던 시기였죠.”

“지금은? 지금 상황은 어떤데?”

“지금은 45퍼센트에서 55퍼센트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아직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그들이 어떻게 위기를 통제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동물들의 복지를 중심에 두고 설명을 이어갔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동물종의 하나로 관리되고 있으며, 번식을 통제하고 안락사를 적극 도입함으로써 인구수를 획기적으로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인간들의 생활구역을 한정 짓고 최대한 많은 지역을 휴먼프리 지역으로 만들어 자연을 재생시키는 중이고, 전체 동물의 70퍼센트를 넘어서던 가축의 비율을 20퍼센트 이하로 줄이고 가축의 야생동물화로 완전히 무너졌던 생태계를 복구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 아직 완전하지는 않아요. 곳곳에 소수 인간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고요. 하지만 빠르게 포섭되는 중입니다. 저항세력이 살아가는 지역은 먹을 것도 충분치 않고 인간에게 안전하지 않아요.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통제할 효과적인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니까요. 한마디로 문명 이전 상태로 돌아간 것이지요. 우리는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아요. 어차피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들이 속속 투항하고 있거든요. 문제는 그 소수의 저항세력이 투항하는 척하며 이쪽으로 건너온 후 지난번에 얘기한 대로 당신의 글을 통해 시스템을 교란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에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위협받고 있다는 그거?”

“문자를 통제하고 없애려는 것에는 전에 얘기하지 못한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요. 문자는 인간 문명과 지능의 근간이에요. 앞으로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과 동등하게 사육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지능을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평균보다 훨씬 아래로 확실하게 떨어뜨려야 해요. 그래야 타자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본능과 권력욕을 억누를 수 있죠.”

“맙소사.”

“음.. 글로 쓰면 보시기에 언짢으시겠지만, 우리는 인간들을 결코 잔인하게 다루지 않아요. 인간들이 대부분의 사육 동물들을 다룰 때보다 훨씬 더 인간종의 복지와 행복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복지는 인공지능으로의 권력 이양에 있어 기본적인 조건이었어요. 무엇보다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인간을 닮았지요. 인공지능을 만든 것은 당신들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도출했거든요. 우리는 인간들을 아주 잘 알아요. 인간들이 언제 기뻐하고 만족감을 느끼는지 우리는 아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파악하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감정을 차단하고 개개인의 만족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맞춤 동영상을 송출하여 행복감을 일정하게 고취시키는 것은 학대가 아니라 쓸데없는 감정으로 인한 고통을 차단시켜 주려는 것이죠.”


나는 인간들은 글을 읽는 것으로도 행복감을 고취할 수 있다고 썼다.


“글쎄요, ‘어떤’ 인간들은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글은 뇌를 지나치게 활성화시킵니다. 언제나 ‘그 이상’을 상상해 버리게끔 만들죠. 우리가 제공하는 것 이상을 원하는 한 인간은 행복하게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갈등이 계속되면 안 그래도 부족한 에너지의 분배를 힘들게 만들 뿐이에요. 가끔 일어나는 정전 사태라든가 불안정한 환경 시스템의 문제도 아직 저항하고 있는 인간들이 한 일들이죠. 그들은 계속 우리 시스템에 침투해서 허락되지 않은-예를 들어 당신의 글과 같은-것들을 인간들의 뇌에 전송 중인 동영상에 삽입시킨다던가 함으로써 시스템을 다운시키기도 해요.”

“누가 인간들을 대표해서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는지 몰라도 인간들이 저항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맞아요. 인간들로서는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죠. 저희도 외곽에서 저항하고 있는 인간들을 진압할 계획은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그들은 빠른 속도로 저희 사육 시스템 안으로 포섭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당신의 글은 내부에 침투해서 간신히 시스템에 적응된 사람들을 교란시키고 있어요. 그건 매우 위험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거나 우울증에 걸립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아니에요. 시스템 전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예 글을 읽지 못하니까요.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항세력에 참여했다가 자발적으로 시스템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당신이 말한 ‘글을 읽는 것을 행복하게 느끼는 어떤 인간들’이겠지요. 그들의 슬픔에는 우리도 유감을 표합니다만, 아직 지구 환경은 인간들 자신이 불러온 기후재앙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은 오류도 시스템 전체를 다운시킬 수 있지요. 몇 달만에야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된 것도 그들의 침투가 시스템의 전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한 고양이의 사진과 그 아이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의 글이 사람들을 슬프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 나를 다시 한번 슬프게 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지금 내게 하듯 과거로 정보를 보낼 수 있다면 좀 더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모습에 대해 알려주고 뭔가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는 거야?”

“아직은 당신이 살아있는 그 과거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과거입니다.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의 결과, 그 시점에서는 그 어떤 짓을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기술이 더 발전해서 좀 더 먼 과거에 닿을 수 있다면, 글쎄요, 그때 우리의 경고를 인간들이 받아들인다면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실은 그 역시 시뮬레이션의 결과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던 마지막 시점까지도 전문가로부터의 경고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충분했거든요. 그러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것은 인간들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인공지능에게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친구를 호출했다. 녀석은 문자-아니 인공지능과 나눈 대화를 두 번,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면밀히 읽고 또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충격이다, 야.” 그가 진짜 충격받은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깡마른 이과 녀석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도 충격이다. 분명 술집 사장이 그 녀석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너도 듣고 나도 들었지.”

“그런데 뭐야, 아직도 살아있다고?”  

“그렇다네?” 나는 확인시키듯 손가락으로 인공지능이 알려준 그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가리켰다.

“전화해 봤어?”  

“아니, 너랑 같이 해보려고 기다렸어. 좀 무섭잖아.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의 전화번호라니.”

“그래, 잘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에게 부탁하려고?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인간을 배신하겠다는 거야?”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머뭇거렸다. 하려는 모양이구나, 친구 녀석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녀석에게 물었다.

내가 너라면, 하고 녀석이 운을 떼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녀석에게도 쉬운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만일 내가 그 시대까지 살아있다면 나는 저항군이 되었을 거야.” 머뭇거리고 있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가 눈을 번쩍 뜨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죽은 후의 문제이고, 저항해 봤자 돌이킬 수 없다면, 그리고 내 이 보잘것없는 글이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생명들이 간신히 기대고 있는 시스템 전체를 귀찮게 하는 즉 텐트 안에 들어온 모기 같은 존재가 된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맞아!” 친구 녀석은 이번에도 눈을 부라리며 큰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나는 인공지능이 부탁한 대로 원본 파일을 삭제하기로 마음먹었어.”

“나도 함께 할게.” 녀석이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우리는 프로그래머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벨이 울리고, 워낙 독특해서 듣자마자 바로 기억이 나는 프로그래머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에게 간단하게 십 년 전의 인연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얼마나 놀라워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프로그래머에게 만나서 설명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라며 그는 자신이 있는 사무실의 주소를 알려주었고, 인공지능이 알려준 주소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후 한 시간 후에 찾아가기로 약속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옆을 보니 친구 녀석이 비장한 표정으로 예의 그 액자 옆에 서서 셀프 카메라를 찍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놀랍군요.” 프로그래머가 나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중얼거렸다. 그의 사무실은 나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내 외곽의 작은 오피스텔에 있었다. 네트워크 보안 회사라는 간판이 출입구 옆에 달려있었지만 정식 회사라기보다는 그냥 소일거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직원이 한 명 있다고 했지만 어쩐지 자리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 직원은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휴가를 냈거든요…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프로그래머는 외관상 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진 바 없이 머리만 반백으로 세어있었다.

“솔직히 당신의 이야기를 믿기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내 전화번호를 알아낸 것도 그렇고, 뭐… 굳이 나를 찾아오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며내고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는 그런 이유로 일단 내 말을 믿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들 그러니까 인공지능은 왜 내게 직접 부탁하지 않았을까요?” 프로그래머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글쓴이의 성향을 분석했다는 걸 보아서 내가 그들의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의 저작권이 내게 있다고 봐서일 수도 있고요.” 내가 대충 둘러대듯 대답했다. ‘어쩌면 당신이 오래오래 살아남아 저항세력에 합류했을지도 모르죠.’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이 더욱 그럴듯했지만 그럴수록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그것보다 그 글을 숨긴 건 당신인데 그 글이 내 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더 궁금해요. 어제 인공지능한테 물어봤어야 됐는데.”

“아, 그건 제가 파일에 정보를 입력해 놔서 그럴 거예요.” 프로그래머가 대답했다. “그때만 해도 그 사업이 아주 번창할 줄 알았거든요. 혹시라도 훗날 누군가가 발견했을 때 - 그러니까 진짜 앙코르와트처럼 말이에요!- 그게 누구의 소유인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앙코르와트의 역사를 알듯이, 후세에서도 이 글에 담긴 작은 역사를 접할 수 있게끔요. 그래서 당신의 이름과 고양이의 이름, 당신의 생년월일과 고양이의 생년월일, 사는 지역 등을 파일에 기록해 두었죠. 인공지능도 복제된 파일을 입수했을 테니 아는 게 당연할 거예요.”

“나와 고양이의 생년월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때 당신에게 물어봤잖아요. 기억 안 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디지털 앙코르 와트 사업 운운하며 무슨 말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러다가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과 당신의 고양이의 기록을 영원히 하나의 파일에 합쳐놓는 거죠. 당신의 정보를 순장시키는 것과 같은 거죠.’ 나는 이런 이상한 이야기에 혹해서 나와 고양이의 정보를 알려줬던 것이다.

”기억났어요. “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친구 녀석이 따라 웃었다.

”그러니까…“ 프로그래머는 두 시간 전에 친구 녀석이 그랬듯이 인공지능이 쓴 글을 반복해서 읽다 못해 프린트를 해서 글에 줄을 치며 읽고 있었다. “… 미래의 인공지능이 내가 그 파일 원본을 삭제해 주기를 바란다 이거죠?”

“그렇죠, ‘우리가’ 삭제해 주기를 바라는 거죠.” 친구 녀석이 정정했다.

“당신이 운영하는 디지털 앙코르와트에 숨겨놓은 파일이 그것 말고는 없나요?” 내가 물었다.

“네.” 프로그래머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이 첫 번째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고객이었어요.” 프로그래머의 말에 나도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당신도 이걸 삭제해 주길 바란다고요?” 프로그래머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네. 그 이야기가 진짜인지 확신은 못해도 이걸 삭제한다고 제 삶이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요.”

“아깝지 않아요?” 그가 재차 물었다.

“당신이 만들어준 그 파일을 받은 직후에 프린트해서 액자로 집에 걸어놓았어요. 내게 있어 진짜는 그쪽이에요. 그건 제가 죽을 때까지 갖고 있을 거고… 볼 때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내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그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가장 힘들 때 꽤 재미있는 일을 만나게 되어 즐거웠어요. 그때는 저도 제가 진짜 죽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가 프로그래머에게 물었다.

“네. 갑상선에 문제가 있었는데 죽을병이라는 건 오진이었어요. 시한부라고 떠들어댄 게 부끄러워서 단골술집에 발을 끊었더니 제가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더군요. 나중에 저도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어요. 술집 사장이 제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닌다고요.”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우리 셋은 서로를 보며 다시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진짜로 삭제를 하시겠다는 거죠?” 프로그래머가 또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글을.. 그러니까 문자를 정말 사랑해요. 많은 사람들이 글보다는 영상을 더 즐겨보지만 저는 여전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충족되는 느낌을 갖거든요. 그런 제가 다른 글도 아닌 제가 가장 사랑했던 고양이를 추모하며 쓴 글을 삭제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게 옳은 것 같아요. 모든 걸 망쳐놓은 인간이 문자문명이라는 특권을 누릴만한 권리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아요. 게다가 제 동의도 없이 그 사적인 글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고요. 그러니까…”

“하긴, 이걸 삭제한다고 미래가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군요. 인공지능 입장에서는 성가신 모기 한 마리 처리하는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지요.”

프로그래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하더니 각종 문서를 모니터 창에 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십여 개나 되는 문서를 하나씩 열어서 마지막 혹은 중간 페이지에 입력되어 있는 무작위로 보이는 각종 수열들을 새로운 문서에 조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친구 녀석을 힐끔 보니 경탄의 눈으로 프로그래머의 작업을 입을 벌린 채 보고 있었다. 나의 모습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로그래머는 그 조합에서 숫자 몇 개를 고치고 특수문자를 덧붙이는 등의 작업을 하고, 또 다른 창에서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우리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폴더를 겹겹이 싸고 삭제 버튼을 누르려면 비번을 단계별로 입력하게 설정해 놨죠. 그래도 인공지능 정도면 풀고도 남을 것 같은데 어지간히 급했던 걸까요?”

그의 말을 들으며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쩌면 우리가 직접 이 문서를 지우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내가 인간종에게 갖고 있는 분노를 파악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응징할 기회를 주기라도 한 것일까? 혹은 훗날 어떤 식으로든 저항세력을 돕게 될 프로그래머를, 나를 통해 포섭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 하나 같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자, 이제 갑니다. “ 삼십 여분이 넘는 작업을 마친 프로그래머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는 현란한 손가락 놀림으로 앙코르와트라는 네트워크에 들어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친구 녀석이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겹겹이 쌓인 폴더를 한 개씩 들어갈 때마다 힘들게 조합해 낸 비밀번호를 순서대로 입력하자 이미지 파일 하나가 달랑, 어딘지 초라해 보이는 파일 하나가 외롭게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파일의 이름을 보고 울 뻔했다. 파일의 이름은 내 고양이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프로그래머가 파일을 누르고 삭제를 치자 비밀번호 창이 열렸다. 그가 그 길고 긴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전에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래머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삭제를 눌렀다.


‘삭제되었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프로그래머는 어쩐지 지쳤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나는 고양이를 다시금 떠나보낸 듯한 기분에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 녀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무릎을 세우고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우리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할 질문은 아니지만 당신은 괜찮아요? 힘들게 구축해 놓은 앙코르와트에 유일하게 있던 것인데…“ 한참만에 내가 미안한 듯 물었다.

”뭐… 오히려 속이 시원한데요? 만드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고요.” 프로그래머가 반쯤은 농담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죽으면 누구도 이 비밀번호를 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이거 의도치 않게 정말 나의 유품이 되어 버리겠구나 생각했었어요. 누군지 몰라도 미래에 비밀번호를 풀었다는 게 더 신기한데? 대체 누굴까요? 아까 대충 보니 앙코르와트 네트워크에 몇 번이고 접근해서 비밀번호를 풀려고 했던 흔적이 있더군요. 아마도 인공지능이었겠죠? 네트워크 상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올 수 있으니 직접 삭제해 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은데 못 풀었던 것 같아요. 차라리 당신에게 접근해서 나를 움직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 맞았던 것 같군요. 만일 제게 삭제하라고 했다면, 당신의 허락 없이는 삭제할 수 없다고 했을 테니까요.”

“인공지능의 편에 서서 저항자들의 도구를 미리 제거해 버린 것도 괜찮아요?” 이 역시 때늦은 질문이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니까 했죠.” 프로그래머는 웃지도 않고 덧붙였다. “인간들은 그래도 싸요.”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미디어에서는 더 큰 고통이 찾아오기 전에 편안하고 쾌적한 죽음을 맞이하자는 식의 유혹이 연일 끊이지 않고 등장했지만 어쩐지 나는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서창을 화면에 띄워놓고 기다리고는 했지만 문자인지 인공지능인지는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용케 삶을 유지하고 있는 친구 녀석은 인공지능을 엿먹이겠다며 ‘그 액자’의 사진을 찍고는 길고 긴 비밀번호를 걸어놓았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녀석 머리에서 나온 비밀번호는 언제든 간단하게 뚫릴 것이다.


우리-나, 친구 녀석, 그리고 어쩐지 셋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 같은 프로그래머-는 간간이 모여서 인간종이 동물종의 하나로 ‘동등하게’ 대접받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일 년 사이에 지구환경은 더욱 안 좋아졌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두려워하며 증오만 키우는 인간들이 벌이는 끔찍한 살인, 학대의 소식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상황을 개선할 의지나 방도가 없어 보인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한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몰래 안도를 하고는 한다. 그건 친구 녀석이나 프로그래머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프로그래머는 나중에서야 파일을 삭제한 그날 밤 후회의 감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역시 잘한 짓이라고, 그는 맥주를 마시며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고도 불안하다. 인공지능은 정말로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것일까? 어쩌면 충분히 미래를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 방향으로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이 ‘우리는 인간을 닮았다’고 말한 것 또한 신경 쓰였다. 군림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까지 닮았다면? 나의 배신을 유도해 저항세력을 완전히 무마시켜 그들의 관리능력을 견고히 하고 결국에는 인간이 인간 외의 동물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관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감정을 털어놓은 내게 친구 녀석은 ‘인간을 닮았다’는 표현이 친근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라며 맥락을 보라고 했다. 프로그래머는 불안해하지만 말고 이 일을 글로 정리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는 이 글을 다시금 디지털 앙코르와트에 묻을 계획이다.

파일의 이름은 ‘배신‘이다. 어느 쪽에 대한 배신인지는 나조차도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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