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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Sep 12. 2024

교주가 되고 싶으면 음모론을 주장하라

필리프 슈테르처 <제정신이라는 착각>3

… 음모론은 많은 경우 모순적으로 보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 모든 확신과 마찬가지로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연결시킴으로써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복잡함을 덜어준다. 음모론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고 큰소리치면서, 사실을 왜곡해서 묘사하고, 왜곡된 비중을 두는 식으로 사이비 이성의 옷을 입는다. 음모론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에 부합하는 내용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모순된 것을 그럴듯하게 풀어주는 능력이다. 이로써 음모론은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에게 혼란스럽고 위험한 세상에서 뭔가를 알고 통제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당신이 모르는 세상보다는 당신이 아는 악마가 더 나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 질환자가 자신들의 망상을 확고히 믿는 것만큼이나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불안한 세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는 확신을 확고히 믿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필리프 슈테르처, <제정신이라는 착각>, 282~3

… 망상적 확신뿐 아니라 음모론에 대한 믿음 역시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불안, 통제 상실, 스트레스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망상과 음모론에 대한 믿음은 동일하지 않다. 이 둘의 근본적 차이는 정신증적 망상은 늘 개인의 망상이라는 것이고, 음모론은 다른 사람들과 확신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카를 야스퍼스는 그의 논문에서 망상과 기타 확신의 차이에 대해 건강한 사람들의 오판은 ‘공동의 오판’이라고 했다. 음모론에는 긍정적인 사회적 동기가 깔려 있다. 일의 연관을 꿰뚫어 보는 사람들의 그룹에 속해 세상의 속사정에 대해 특별한 통찰을 나누는 것, 그로써 멍청한 ‘보통 사람들’과 차별화된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병리적 망상은 종종 사회적 고립을 가져온다.

(중략)

그러나 이 연구는 이 둘 사이의 몇몇 중요한 차이도 밝혀냈다. 그래서 편집증적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되는 반면, 음모론은 특정 집단에게 악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음모론은 대부분 권력과 영향력이 있는 엘리트들을 겨냥하며, 정부나 언론계 사람들에게 의심을 품는다. (중략) 임호프와 램버티의 말을 빌리자면 편집증과 음모론에 대한 믿음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편집증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겨냥한다고 보는 반면,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모두를 겨냥한다고 본다.”

-위의 책, 283~5

굳이 첨언할 것도 없이 슈테르처씨의 냉소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분석은 예리하고 신랄하다. 저자가 속한 독일 사회 못지않게 한국 사회는 개개인의 편집증적 망상장애가 불러온 참극과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각종 음모론이 활개를 친다. 음모론의 본질에 ‘우월감’이 깔려있다는 분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음모를 꿰뚫어 본 우리는 세상을 통제할 힘이 있다! 이런 집단의식이 강력해질수록 사이비 종교와 유사해진다. (일단 생각나는 음모론의 대가이자 교주가 있는데… )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음모론을 퍼트린 주체(교주)에 의해 통제되는 역설적 결과를 향해가는데 문제는 본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또한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점이다. 교주에게 재물과 믿음을 바치며 음모론의 공동체 안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사이비 종교와 유사하다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심각한 사회 현상들에 대한 저자의 처방은 ‘불확실성을 허용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능력은 개개인의 특성에 속한 것이지만 학습이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실은 종종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는 것, 단순한 ’진실‘은 속임수라는 것, 현실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330~1)

앞으로 팬데믹은 더 자주, 더 독하게 찾아올 것이고,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극단적인 대립의 정치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며, 이미 시작된 기후 위기 현상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불안에 취약한 사람들의 편집증적 병증과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모론은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고, 그 자체로 다시 새로운 불안과 음모론을 부추긴다. (음모론에 대항하는 음모론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세월호를 둘러싼 양극단의 음모론과 그 세력들이 어떻게 힘을 키워갔는지를 보라) 교육은 모든 문제들의 근본적인 대책이기는 하지만 당장 가속페달을 밟은 듯한 이 불안의 사회를 제어할 수는 없다. 저자 역시 음모론을 믿거나 확산시키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레시피도 없고, 이 책 또한 그런 대책을 구상하려고 쓴 책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

한때 나는 음모론을 꽤나 좋아했다. 현실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의 차원에서다. 프리메이슨 같은 건 시작점은 흥미진진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억지로 이어 붙인 것들이 유치해서 별로였고, 고대 인류의 벽화에 남겨진 외계인 방문설이라든가 인류 문명 이전의 고대 문명의 존재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써놓고 보니 그런 건 음모론 같지는 않은데, 하여튼 달러를 둘러싼 음모론이라든가 하는 것들처럼 음모론을 티 안 나게 살짝 섞어놓은 현실 분석 서적을 읽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대충 사는 인간의 정신머리를 일깨워 준 것은 음모론이 현실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눈으로 확인시켜 준 이들이다. 그들이 권력으로부터 감시과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초창기의 주장부터 이미 전형적인 음모론자들의 행태를 보여준 것이었는데 뭐에 홀린 듯 다 같이 속아 넘어간 것은 ‘우리가 악과 싸우고 있다’는 공동체적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선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최대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할 수는 있겠지만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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