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막 진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학교에서는 진로체험 아카데미라는 걸 했었고 그날부로 나는 목표를 포항공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하는 것으로 정했다. 입학 당시 성적이 전교 20등 수준이었기 때문에 남은 3년을 열심히 보내면 완전히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던 어느 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갑자기 나한테 "너는 그 캠프 지원 안 해?"라고 물어봤고 아무것도 들은 게 없던 나는 무슨 캠프냐고 오히려 반문을 했다.
알고 보니 포항공대에서 주최하는 이공계대탐험이라는 행사가 있었고 학교당 1명씩 추천을 받아 쓸 수가 있었는데 나는 이 캠프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당장 교무실로 찾아가 나도 지원하고 싶다고 했고 그 당시 교무부장 선생님께서는 학교당 1명밖에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친구와 나 둘 중에 누가 쓸 것인지 우리 보고 정해오라는 황당한 말을 했다.
당시 그 친구는 나랑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성적으로 늘 1,2등을 다투는 라이벌이지만 정말 친한 친구였다. 꼬리표를 받고 내가 어떤 과목에서 2등이 나오면 1등은 안 물어봐도 그 친구일 정도로 흔히 얘기하는 선의의 라이벌이었다. 사이가 안 좋을 법도 한데 나랑 이 친구는 진짜 서로 친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우정반지를 같이 끼고 자기 언니 시계를 나한테 줘서 한동안 같이 끼고 다닐 정도로. 그 당시 이 친구는 서울대를 가고 싶어 했고 나는 포항공대를 가고 싶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우정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게 서울대에서 주관하는 캠프가 아니라 포항공대에서 주관하는 캠프였기 때문에 내가 가고 싶었다. 이 친구랑은 야자시간 사이사이 쉬는 시간에 틈틈이 만나서 얘기하거나 방과 후에 서로 문자도 하면서 계속 상의를 했지만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이게 서울대에서 주관하는 거였으면 당연히 너를 보냈을 거라고 근데 이건 포항공대에서 주최하는 거지 않느냐는 논리였고 이 친구는 그건 맞지만 스펙으로 도움이 될 거기 때문에 자기도 포기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우리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교무실에 갔고 학년부장, 교무부장님과 상의 끝에 이번에는 원래 쓰기로 했던 내 친구가 쓰는 걸로 결정이 났다. 이 캠프는 1학년 겨울에 한번, 2학년 여름에 한번 총 2번의 기회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이번에 얘를 보내는 대신에 2학년 여름에는 내가 쓰게 해달라고 했었다. 근데 그건 장담할 수 없다면서 그 당시에 가보고 네가 성적이 괜찮아야 가능한 거라고 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1학년때 성적은 걔가 더 좋았기 때문에 선생님들 입장에서 걔한테 기회를 주는 게 맞는 결정이었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당시의 나는 이걸 공식적으로 공지를 해서 지원자를 받은 게 아니라 전교에서 유일하게 걔 하나만 따로 불러서 얘기했다는 사실이 매우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이런 캠프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친구가 이 친구 1명 말고는 없었다.
더구나 그 당시의 학년부장 선생님은 처음에 전교 22등 까지 들어가는 영재반 친구들을 돌아가며 상담을 할 때 대놓고 나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묻길래 회사원이라고 했더니 그다음엔 바로 차를 물어본 선생이었기 때문에 불신은 더더욱 컸다. 학생 진로상담을 하는데 아빠차가 뭔지 왜 물어보는지 지금 생각해도 눈에 빤히 보이는 수라 기분이 나빴다.
그 친구의 부모님은 아빠는 의사 엄마는 간호사였고 엄마는 학부모회장으로 학교에도 자주 오고 당연히 선생님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영재반 엄마들 중에서 유일하게 맞벌이를 하는 집으로 매번 평일에 열리는 영재반 학부모회는 고사하고 학교에도 한 번도 못 왔고 선생님들 중에는 나에게 해설과 답이 다 적혀있는 교사용 도서를 몇 권씩 가져가라고 주는 선생님도 있었으니 우리 집 사정이야 선생님들 사이에서 빤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친구가 먼저 쓰기로 했으니 이번에 그 친구가 쓴다는 말을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캠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먼저 쓰기로 했다니? 차라리 객관적인 성적으로 비교를 해서 내가 더 성적이 낮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납득을 했을 텐데 아마 돌이켜보건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수학, 과학만 따로 성적을 내거나 혹은 전체성적으로 비교하더라도 큰 차이가 나지 않거나 오히려 내가 더 성적이 좋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막연히 그 친구의 1학년때 성적이 더 좋았으리라는 것은 이 과정을 납득하기 위한 나의 추측일 뿐이고, 1학년 1학기때의 성적과 그동안의 모의고사 성적은 항상 들쭉날쭉했기 때문이다. 내가 문과 이과가 갈라지면서 이과에 가서 압도적인 1등을 하는 과정에 있기 전까지 여고라서 이과반은 인원이 적어 항상 등수싸움이 치열했기 때문에 압도적인 1등은 없었다. 더구나 제일 명확한 증거로 분명 그 친구가 1등이 아니었는데, 이 캠프를 그 친구만 알고 있다는 거에서 말 다한 거 아닌가?
나는 학년부장 선생님도 믿을 수 없었고 그 친구에게만 처음 이 캠프에 대해 얘기한 다른 선생님도 믿을 수 없었고 2학년 때 남은 마지막 기회마저 이런 식으로 밀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아예 처음부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억울함에 휩싸여 최종적으로 그 친구가 지원을 해보기로 결정이 나고 나서 영재반 교실에 야자를 하러 와서 공부는 못하고 너무 억울해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2학년 여름에는 나한테 아무도 뭐라 할 수 없게 압도적인 성적으로 이기고자 눈물의 다짐을 하며 무조건 전교 1등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를 위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건 뒤에 다른 에피소드로 또 나온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 친구는 1학년 겨울에 지원은 했지만 떨어져서 캠프에 가지 못했고 나는 2학년 여름 때 전교 1등의 지위로 지원해서 캠프를 다녀올 수 있었다.
다녀오고 나서야 나도 제대로 준비가 안된 1학년때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허무하게 날려버렸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과적으로 그 덕에 공부도 죽어라 해서 성적도 올렸으니 오히려 그 친구한테 고마워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한동안 그 친구랑 사이가 서먹해졌었다.
나중에서야 내가 2학년 여름에 캠프를 다녀오고 나서 내 안에서 이 앙금이 풀리고 나서 다시 차분히 얘기를 해보니 그 친구도 나름 진로의 변화와 갈등을 겪으며 일단 스펙을 챙겨야 하는 처지였고, 입학사정관 전형아래 스펙 한 줄이라도 더 적으려면 그걸 친구가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서 주최하는 캠프라는 이유로 양보하기에는 내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나 싶기도 하면서 그 친구랑은 다시 뭔가 완전하게 화해를 하고 잘 지내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서러웠던 기억이다.
참고로 서울대에서 주최하는 캠프라면 너에게 양보했을 거라는 내 말은 정말 진심이었던 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대도 포항공대도 아닌 다른 이공계대학에서 주최하는 캠프가 또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내신성적으로는 거의 압도적인 1등이었는데 그 학교를 가고 싶어 하는 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반에서 2-3등 정도의 성적이었고, 나도 계속 기계공학과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내가 그 캠프를 가고 싶다고 하면 학교에서도 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 캠프를 그 친구한테 양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