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게
이 세상에는 나를 흔들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저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위태롭게 표류하는 조각배일 뿐인데,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파도들이 쉴 새 없이 들이친다.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봐도 점점 버겁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조각배는 결코 바다에서 제 명대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조각배에서 내리기로 했다. 그 대신 작은 유리병을 선택했다. 누군가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편지를 유리병에 넣고 바다에 띄우는 심정으로 나를 담았다. 유리병은 비좁았다. 조각배 위에서는 다리라도 쭉 펼 수 있었고 바닷바람이라도 실컷 맞을 수 있었다. 유리병 안에서는 웅크리고 있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유리병 자체는 안전하다. 파도가 아무리 들이쳐도 가라앉을 걱정이 없다.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고, 그냥 파도가 오면 오는 대로 넘실거릴 뿐이다. 멀미가 나는 것도 이젠 익숙해져서, 유리병 안은 고요하고 작은 나만의 우주가 되었다. 그 우주에는 별이 하나뿐이었다. 외로웠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잔잔한 바다 위의 조각배 같은 삶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이 조각배 대신 유리병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조각배의 삶과 유리병의 삶. 정답은 없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조각배가 묘사하는 삶은 ‘적극적이며 높은 감수성을 가지고, 매사에 열정적인 삶.’이다. 반면 유리병이 묘사하는 삶의 태도는 ‘소극적이고 감정을 온전히 표출하기를 꺼리며, 주변의 것들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삶’이다. 혹자는 유리병의 삶이 너무 소시민적이지 않냐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리병의 삶을 권한다. 위태로운 조각배와 평화로운 유리병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그렇다. 사실 조각배를 위협하는 대부분의 파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걱정과 근심, 후회와 죄책감, 열등감 등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감정들은 오히려 조각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주변에 관심이 많고, 매사에 전심을 다 하는 사람일수록 잘못됐을 때의 반작용에 더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닐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이미 지나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후회하고, 주변 사람을 곁눈질하며 비교하다가 열등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감정 변화의 폭이 큰 편이라 부정적인 감정의 크기도 커서 결국 조각배가 뒤집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만큼 큰 파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마주하면 중심을 잃어 휘청거리고, 부정적인 감정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쏟아 매몰되기도 하며, 필요 이상으로 주변의 것들을 의식한다. 그러나 나를 좌절케 했던 일과 순간들은 지나고 보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런 일과 순간들은 대부분 피할 수 없기 마련이다. 도망가려 안간힘을 쓰고, 걱정하고 후회해도 결국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과거에 묻고 미래를 향해 노를 저을 수 있게 된다.
사실 우리 삶에서 조각배를 뒤집을 만한 파도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몇 차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굳이 조각배를 버리고 유리병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초연하다’는 ‘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다.’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다. 마찬가지로 정말 좋아하는 단어라 소개해 보고 싶어 이번 글을 쓰게 됐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여행자이다. 인생을 조각배에서 보낼지, 유리병에서 보낼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아무쪼록 조각배에 오르자. ‘적극적이며 높은 감수성을 가지고, 매사에 열정적인 삶’을 살자. 동시에 ‘초연하게’ 살자. 피할 수 없는 일은 마주하고,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마주한 뒤 스쳐 보내고, 나의 편이 아닌 내 주변의 것들에 지나치게 관심과 감정을 쏟지 말자. 어떤 현실을 마주하더라도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게 살자. 초연하게 조각배에 올라 망망대해를 누비는 모험가가 되자. 그렇다면 우리의 항해를 위협할 파도는 더 이상 없을 테니까. 아침엔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일어나고, 점심엔 바다가 주는 선물을 먹으며, 저녁엔 나란히 뱃머리에 앉아 저무는 노을을 보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자. 조각배에 오르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지레 포기하지 말자.
초연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