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냄도 Nov 27. 2023

억겁에 찰나를 보태며

육군 5군단 창설 70주년을 기리기 위해

따스한 봄이 차디찬 겨울을 이기고 돌아온 것이 일흔 번째였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다.


 소년은 노인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생겼고, 눈두덩이는 깊게 팼으며, 기력은 점점 쇠하여 갔다. 당시의 기억은 점차 흐려져 갔고, 그 자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들어찼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많지 않았다. 열댓 평 남짓한 낡은 아파트와 빛이 바랜 훈장, 가끔 연락하는 자식과 손자들 정도. 이젠 제대로 땅을 딛고 시 있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이 땅 위에 발붙이고 있는 모든 것을 남겼다. 그가 없었다면 진작 불에 타 없어졌을 것들이, 그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다. 세상이 그의 수고로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세상에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외려 더한 고생을 자처했다. 그의 인생에는 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끝끝내 지켜낼 수 있었으리라.


 전쟁터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초연이 자욱이 내려앉고 곳곳이 피로 물들었던 산천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고 가정을 꾸렸다. 비극의 아픔도 아스라이 옅어졌다. 그는 폐허였던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었다. 곡식을 재배한 지도 어언 스물 몇 해가 되자, 그는 그 자리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만들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만들어서 내다 팔았다.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며 일한 덕분에, 그의 가족들은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을 수 있었다. 그는 전쟁터의 군인이었고, 논밭의 농부였으며, 공장의 노동자였다.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구태여 하지 않는다. 총상을 입은 전우가 바로 옆에서 숨을 거두어간 이야기, 삼일 밤낮으로 고지에서 몰려오는 적군과 맞선 이야기. 그런 슬픈 비극은 본인 혼자 간직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그의 자식들은 평화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는 그렇게 편안히 눈을 감는다.


 찰나는 억겁이 되었다. 소년은 자신의 젊은 나날을 나라에 바쳤다. 그 한 사람으로 본다면 찰나였을지 모르지만, 많은 이가 소년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이가 군인이었다. 이 땅에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을 초개로 여기는 이들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이 모여, 찰나가 모여 억겁이 되었다. 이 나라를 영원히 지킬 방패가 되었다.

 방패는 많은 이들의 염원이 하나로 모인 것이다. 그런 그들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때를 다하고 물러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방패를 더 굳건히 치켜들려는 이들도 있다. 그렇기에 이 나라의 역사는 무궁히 쓰인다.

  나도 찰나를 보탠다. 수많은 선배 전우의 피와 땀으로 다져진 이 땅에, 기꺼이 나를 한 줌 뿌린다. 다행히 외롭지 않다. 내 곁에는 노인이 있다. 그 명을 다하였지만,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노인이 있다. 내 곁에는 소년이 있다. 인생의 가장 꽃다운 날에 노인의 빈자리를 메우려 기껍게 총을 짊어진 소년이 있다. 나는 소년이었고, 노인일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다.

작가의 이전글 갈색 제비집(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