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 #4
사랑하는 울 아들딸을 위해 몸도 낫지도 않은 채 일을 했다.
사람은 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했다.
다시 또 전쟁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힘들고 정신이 혼미해져 와도 나만 찾는 내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파트도 분양받아 입주하고 직원도 20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이젠 소매업에서 법인으로 바뀌고 제법 자리도 잡혔다.
식당밥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1층에서 밥도 해주고 영업도 하고 사무실 직원들 챙겨가면서.
하지만 경리만 들어오면 조금 있다 나가버리고 (몹쓸 짓도 많이 했다.) 그야말로 갑질 아니면 치근덕 대는 것을 너무 했다.
나를 그림자 취급하니 들어오는 경리들이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했다.
사모님 대접받기는 커녕 마음고생이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앞을 바라볼 수가 없어 항상 고개를 땅을 보며 다녔다.
다행히 손윗 시누이 (아이들 고모) 며느리 되는 (그때는 질부였지) 박대리가 들어오면서 차츰 자리가 잡혀갔다.
우리 박대리 심성이 굳고 의리가 있고 의지가 강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아주 예쁜 사람이었다.
사장이 아무리 구박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삭혀가며 옳지 않은 일에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한시름이 놓였다.
나는 식구들 앞에서 선언했다.
이제 더 이상 당신 노예로 살지 않겠다. 이혼하자고 했다.
나는 늘 생각했다.
막내만 고등학교 졸업하면 이 사람이랑 그만 살 거라고 다짐하며 살아왔다.
우린 작은아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혼을 했다.
물론 아이들은 대 찬성이었다.
함께 법원에도 갔었다.
집을 나온 나는 딸과 함께 단칸방을 얻어 생활했다.
아무것도 없이 나와 막상 딸과 살려고 하니 막막했다.
나는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부터 했다.
나 이렇게 살다가 지금 이혼한 상태에 딸아이와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이야기하니 재산 분할 청구소송을 하면 재산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선금 없이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해줄 테니 승소하면 그때 계산해서 받는다는 말에 나는 변호사를 선임했다.
그러고 나니 남편은 오만구실을 만들어 대응을 했고, 회삿돈 공금횡령으로 형사고발까지 한 게 아닌가
민사는 변호사에게 맡겼으나 형사사건은 그렇지도 않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경찰서로 불려 다녔다.
저는 한 푼도 횡령한 것 없다고 진실을 얘기했고 경찰아저씨도 '아줌마 어떻게 이렇게 독한 남자를 만나서 살았어요?' 했다.
그냥 고개만 숙이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눈물만 나올 뿐
사나흘에 한 번씩 증인 있다. 또 다른 증인 있다.
이웃 모텔 여사장부터 시작해서 경리, 나도 모르는 사람들, 나를 그렇게 좋아하던 남편의 매형까지
경찰서 안이 때로는 도떼기시장처럼 많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는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형사사건으로는 한 달 남짓 무혐의로 종결되었지만 민사는 결국 대법원까지 가는 바람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밥도 못 넘기고 그때부터 술로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 같다.
한창 젊은 나이에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병원에 가니 고혈압 200에 180.
의사도 깜짝 놀라며 링거 한 대와 한 달 치 약을 처방받았다.
민사로는 거의 4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젠 너무 힘들어 그만둘 수도 안 둘 수도 없었다.
계속 밀려가는 변호사비 때문이라도 그만두질 못했다.
그때 경찰서 형사도,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도 예쁘장하게 홀로 된 여자가 코너에 몰려 있으니 몸을 요구하기도 하고 오만 잡스러운 짓들을 해댔기에 더 힘들고 수치스럽고 살기가 싫었다.
민사소송 4년 여만에 승소 재산분할을 받게 되었지만, 그 남자 돈은 내가 바로 준다고 나오라고 했다.
계좌로 바로 넣어달라고 하니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만나서 받아가라 그래서 딸과 함께 나가서 수표로 준비한 거 받아서 바로 변호사 사무실로 직행했다.
고마운 마음도 전하고 변호사비도 계산해 주고 나니 내가 이것 받으려고 4년을 시달려가면서 병들어가면서 했나 싶을 정도로 허탈했다.
남은 돈으로 조그마한 복층 오피스텔을 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