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는 집에서 차로 1시간이나 떨어진 관악구의 한 골목에서 음식 장사를 했다. 난곡에서 신대방으로, 또 신대방에서 신림동으로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새벽 늦게까지 장사를 놓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내가 열 살 되던 무렵부터 가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나의 유년 시절은 늘 엄마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에 가득 차 있었다.
나와 동생은 부모의 부재가 늘 그리운 아이들이었으니, 방학이나 주말이 되면 엄마·아빠 가게로 나가 밤늦게 함께 퇴근했다. 가게 구조에 따라 때로는 좌식 테이블에서, 때로는 가게 한 구석 쪽방에서 불편하게 놀다가 새벽 두 세시나 되어야 안락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던 때도 아니니, 심심하고 피곤한 일정이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엄마·아빠와 온종일 있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꼭 놀이동산이라도 다녀온 날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주말이면 부모님과 놀이동산이며 동물원을 갔다고 자랑하는 틈에 나는 엄마·아빠 가게에서 놀았다고 하는 게 뭔가 특별해 보였다. 그런 들뜸이 가게로 나가는 날을 기다리게 했다.
물론 함께 있다는 추상적인 즐거움보다 더 실질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할 장치도 존재했다. 아빠는 우리가 나온 날이면 가끔 엄마와 둘이서만 즐겼을 새벽 데이트를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퇴근 시간인 두세시면 늘 졸린 눈을 겨우 뜬 상태였는데, 아빠 차에 올라타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갈까?”라는 말이면 눈이 번쩍 뜨이곤 했다. 늘 엄마의 “이 시간에 무슨 짜장면이야”하는 핀잔이 따라왔지만 말이다.
우짜자하우스 맛이랑 비슷한 집 앞 짜장면집. 비주얼은 심히 고급스럽다. ⓒ 이현희
난곡 언저리쯤 있었던 우짜자 하우스는 우리 가족의 단골 새벽 데이트 장소였다. 우짜자 하우스는 우동과 짜장면을 한 그릇에 천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팔았다. "이 좋은 곳을 엄마랑 아빠만 왔단 말이야?"라는 철없는 소리를 해대며 열심히 먹었다.
그곳 짜장면과 우동은 빠른 조리를 위해 같은 면을 썼는데도 면이 쫄깃해서 술술 들어갔다. 달콤, 짭짤한 짜장면은 애들 입맛에 너무 잘 맞았고, 고춧가루와 후춧가루를 넉넉히 뿌린 우동은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짜자하우스로 가는 길에는 늘 침을 삼키며 둘 중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게 일이었다.
저녁 시간 이후로도 한참을 일하다가 퇴근하는 새벽이면 배가 고프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어린 자식들이 깰세라 집에서는 뭘 해 먹지도 못하고, 새벽이라 문을 연 곳도 별로 없었겠지. 겨우 우동과 짜장면 한 그릇씩 사 먹으며 노고를 달랬을 두 분을 생각할 줄 몰랐다.
'먹을 것'이 주는 위로는 단편적이면서도 폭발적이다. 엄마와 아빠의 벌이로 먹고 자란 나는 이제 생산 가구원이 되었다. 가끔은 집으로 향하는 길, 아빠가 좋아하는 단팥 도너츠나, 엄마가 좋아하는 찰떡, 찰옥수수 같은 걸 한 손에 담아 돌아오기도 한다. 서로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확인하지 않고도 위로와 응원을 전할 방법이다.
지금의 나도 회사를 쉽게 다니는 건 아니지만, '어린 자식을 떼어 놓고 일한다'라는 무게보다는 가벼운 하루를 보낸다. 그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고자, 먹는 것이라면 그저 좋은 자식들에게 먹을 것으로 서툰 마음을 전한 엄마와 아빠. 평생 가도 그들과 같은 마음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피곤한 퇴근길이면 빵집과 떡집을 차례로 들른다. 노고를 지우고 환한 얼굴로 “아빠가 짜장면 사줄까?”하고 묻던 그 새벽처럼 나의 얼굴에도 노고가 묻어나지 않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