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이

<자기 앞의 생>을 읽고

by 눈부신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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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진정한 일곱 살>이라는 그림책, 허은미 작가의 딸이 예닐곱 살 무렵 '진정한'이라는 단어의 매력에 빠지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진정'이라는 심오한 단어를 7살 아이는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책 표지에는 앞니가 하나 빠진 당당한 표정의 주인공이 슈퍼맨처럼 등장한다. 앞니가 빠진 모습으로 자랑스럽게 활짝 웃고, 싫어하는 음식도 꾹 참고 골고루 먹는다.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상대에게 멋지게 양보할 수도 있고, 산타의 실수가 무척 실망스럽지만 산타를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일곱 살이나 되었으니 그 정도는 어엿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주인공이 귀엽기만 하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말썽 부리고 떼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는 누구보다 성장의 단계를 생각하며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마음처럼 쉽게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혼자 잘 수 있다고 당당하게 침대에 누운 주인공은 이내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결국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평온하게 잠이 든다. 익살스러운 그림과 공감되는 내용을 통해 ‘진정한 일곱 살은 어떤 나이일까?’라는 물음 속에 '진정한 마흔'을 생각해보게 된다.


‘진정(眞正)하다’는 참되고 올바르다는 뜻이며, 주로 형용사로 사용한다. 스스로 진정성을 부여할 때는 존재의 가치와 의미 부여하게 되지만, 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게 되면 역할이나 위치를 규정할 수도 있다.


종종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아이에게 ‘미운 일곱 살’이라 부른다. 자의식이 생기면서 자기 존재를 느끼고 표현하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을 반항하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라 바라본다. 반항과 고집은 탯줄로 연결된 생명체가 독립적인 인격체로 분리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당혹감이나 몸부림일 수 있다.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어떤 틀에 넣어 규정하지 않고, 존재 자체에 경이로움과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몇 살에 이가 빠져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가 빠지는 과정에서 겪는 아이들의 신체적・심리적 변화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땅에서 무거운 발을 떼고 한 걸음 걸어가던 그 순간의 감동과 감탄을 기억하며, 자신의 생(生)을 부단히 걸어가는 매 걸음을 진정한 마음으로 응원해야 할 것이다.


작가도 비슷한 마음으로 ‘진정한’의 매력에 빠진 아이를 응원한다.


괜찮아! 진정한 일곱 살이 아니면 진정한 여덟 살이면 되고, 진정한 여덟 살이 안 되면 진정한 아홉 살이면 되고. 진정한 아홉 살이 아니면 진정한 열 살이 되면 되니깐…
<진정한 일곱 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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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은 열네 살이지만 열 살로 살아가는 소년 모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담담하게 그린다. 모모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심지어 자신의 진짜 나이도 모른 채 파리의 빈민가에서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고 있다. 모모의 삶은 참 외롭고 비참하다. 모모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도 역시 사회에서 소외된 불쌍하고 쓸쓸한 약자이다. 행복이나 아름다움을 어디서도 찾기 힘든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의지하며 각자의 삶을 묵묵하게 살아간다. 실제 나이보다 네 살이나 어리게 살기 때문인지, 보통의 아이들이 겪지 않은 삶의 경험 때문인지, 모모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버렸다.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모모의 생각이나 말속에는 놀라운 삶의 지혜가 숨어 있었다.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지만, 모모는 오히려 죽음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로자 아줌마를 보살핀다. 로자 아줌마도 어린 모모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의지한다. 삶에는 분명 물리적인 부분이 필요하지만, 진심으로 믿고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이 빠질 수 없는 것이리라. 특히 이생(this life)의 작별을 준비하는 시점에는 물리적인 것의 가치가 극도로 낮아지고, 믿음과 진심 그리고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함께 하는 마지막 생은 무척 안타깝고 무모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진심 어린 사랑과 단단한 믿음을 기억하며 애써 아름답게 포장해본다.


열 살이지만 사실은 열네 살이었고, 열네 살이지만 죽어가는 노인을 보살펴야 하는 아이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벅차고 혼란스러웠을까! 모순된 상황에서 겪는 다양한 고충을 모모는 ‘나이’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신의 삶을 응원한다. “민족적인 대재난”(모모의 친아버지가 등장하고, 모모의 진짜 나이를 알려준다)을 통해 갑자기 네 살이나 나이를 먹어버린 모모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네 살이나 더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힘겨운 상황에서 흐르는 울음을 참아내고, 감당하기 힘든 거짓말을 하는 상황도 네 살이다 더 먹은 값을 한 것이라 애써 위로한다.


어린 모모의 작은 등에 지워진 엄청난 삶의 무게가 내 마음을 짓누른다. 진정한 열 살, 아니 열네 살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힘들다고 주저앉아서 울거나 떼를 써야 한다. 차라리 반항하거나 나쁜 행동을 일삼는 것이 진정한 모습처럼 느껴진다. 진정한 열네 살이 깨우치기 어려운 삶을 너무 일찍 이해한 모모는 “네 살이나 더 먹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위로하며 당당하게 삶의 무게를 지고 걸어간다. 그래 봤자 고작 열네 살이라는 생각에, 마흔의 나는 가슴이 아려온다.


“슬프고 아름다운 그리고 신비롭고 경이로운 삶의 이야기”라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으며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내가 어린 모모를 향해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도, ‘진정한 나이’에 대해 규정짓고 어떤 잣대를 대는 것은 아닌가를. 규격화된 관점 때문에 다양한 삶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과 삶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를.


이미 내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모는 당당히 말한다.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
(자기 앞의 생. 267p )


로자 아줌마의 생(生)은 끝났다. 로자 아줌마와 함께한 모모의 생(生)도 함께 막을 내렸다. 앞으로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 모모는 과연 어떤 생(生)은 그려갈까?



***

나는 5살이다.


가끔 신발의 좌우가 헷갈리지만 혼자 신발을 신을 수 있고, 좀 느리지만 혼자서 옷을 입고 단추를 채울 수도 있다. 세수를 하다 보면 옷이 홀딱 젖지만, 펭수 손 씻기 노래를 끝까지 부르며 깨끗하게 손을 씻을 수 있다. 혼자서 밥도 잘 먹고 그림도 제법 잘 그리고 책도 본다. 그리고 나도 ‘숙제’ 정도는 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두 명 있다. 엄마는 매일 오빠들에게 숙제를 하게 하고, 책을 읽도록 한다. 오빠들이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인다. 그래서 늘 궁금하고 매번 함께 하고 싶다. 엄마는 다섯 살은 아직 할 수 없다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시키지 않는다. 진정한 다섯 살은 오빠들이 하는 것쯤은 할 수 있는 나이인데...


가끔 오빠의 학습지를 펼쳐서 오빠처럼 멋지게 문제를 풀어보고, 오빠가 보다만 영어 영상을 재미있게 보며 그럴싸하게 따라 해 본다. 역시 다섯 살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낙서한 책을 향한 엄마의 외침과 싸늘한 손길뿐이다.


‘진정한 다섯 살은 이런 것쯤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열심히 숙제를 한 덕분에 apple, ant, bear, bed 그리고 cat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엄마가 이전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환호한다. 엄마도 이젠 진정한 다섯 살을 알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엄마는 오빠들이 쓰다만 알파벳 교재를 건네며 말한다.


“여기에 마음대로 낙서해.”


진정한 다섯 살은 아직 연필은 잡는 것은 서툴지만, 비툴 비툴 따라 쓰는 것쯤은 할 수 있다. 나는 절대 낙서하는 것이 아니다. 역시, 아직도 엄마는 진정한 다섯 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한 숨이 난다. 하지만 진정한 다섯 살은 이런 실망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

"엄마, 나 숙제 중이야!”

“엄마, 혼자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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