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를 읽고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 싯다르타 75p-
주말 오전부터 바쁜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침부터 느껴지는 화창함이 애써 내딛는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끌었다. 빠르게 스치는 창밖의 풍경을 외면하며 약속 장소로 향한다.
욕심을 내서 마련한 시간인데 도통 미팅에 집중할 수가 없다. 기가 막히게 멋진 날씨에 한반도가 들썩거리고, 그 소식은 실시간으로 내게 전해졌다. 멋진 사진을 흘깃 쳐다볼수록,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내 안에는 차가운 칼바람이 불고, 마음이 시려졌다.
미팅이 끝나기 무섭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달려간다. 멋진 하늘을 배경으로 가족사진 한 장 남기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이제야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에 들어섰다. 거실에는 여전히 커튼이 드리워있고, 핸드폰에 빠진 가족들은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멋진 날씨 아래 온 세상이 즐기는 축제에 우리만 고립된 느낌이다. 밝고 화창한 세상과 달리 어두침침한 거실은 감옥 같았고,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가족들은 죄수처럼 느껴졌다.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애꿎은 그릇에 화풀이하며 주린 배를 채웠다.
“애들아, 우리 어디로 나가볼까?”
“여보, 날씨가 너무 좋은데 어디 가자!”
설레고 흥분된 마음과 상반된 기류가 온 집안에 감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고, 무심히 내 목소리만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뒤늦게 엄마의 이상 기류를 감지한 가족들은 무겁고 느리게 몸을 움직인다. 이미 복잡한 감정과 줄다리기하며 지친 나는 홀로 집을 나섰다.
한강 입구 즈음 걸어오니 아이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깜박인다. 아이의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혼자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울적한 기분과 무거운 생각이 물 따라 흘러가곤 했다. 오늘은 걸으면 걸을수록 마음이 더욱 무거워지고 얼굴은 어두워진다. 멋진 날씨를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눈길을 둘 곳이 없어 무척 피로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벤치에 앉아 따뜻한 커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 본다. 뭘 해도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이 해소되지 않는다. 어스름이 내려앉자, 가족들이 나를 찾는다. 어느 때보다 반가운 떨림이지만, 여전히 발걸음이 무겁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며시 들어가서, 가족들을 마주한다. 잔뜩 물을 먹은 솜처럼 무겁게 축 쳐져 있는 내가 느껴진다. 마음을 꾹꾹 누르며 앞치마를 입고 부산스럽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걷는 내내 이어지던 생각의 고리가 최근 읽고 있는 책과 연결되어 낯선 생각에 닿았다.
'오늘 내가 느낀 다양한 감정을 감추지 말고 솔직하게 나눠볼까? 남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감정 코칭>이라는 책에서 계속 강조하잖아! 아이의 감정을 읽고 공감해주려면 먼저 부모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싯다르타>에서도 가르침보다 체득의 중요성을 강조하잖아! 매일 읽고 쓰는 것에 가치를 더하려면 실천해봐야 하는 거야’
쌀을 씻을 때부터 떠오른 생각은 저녁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내 안에서 맴돌았다. 평소 아이들에게 엄마의 힘들고 슬픈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힘들어도 괜찮은 척, 슬퍼도 담담한 척 감정을 축소하고 숨겼다. 아이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려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서운하고 슬픈 감정이 아이들에게 전이되어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다. 표출하지 않고 꽁꽁 숨겨둔 감정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했다. 아무리 걸어도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는 얄궂은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 저녁 식사가 끝나기 전, 맴돌던 이야기를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가족들아~”라고 낯설게 던진 한마디를 시작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이어갔다. 죄책감, 미안함, 서운함, 답답함 그리고 외로움까지. 말을 꺼내자마자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공을 아무리 째려봐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아이들 앞이라 무척 부끄럽고 창피했다. 멋지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가족들은 눈물에 살짝 당황했지만 인간 엄마를 반겼다. 가족들의 다독임에 힘입어 눈물 너머 살포시 웃음이 더해진다.
어눌한 주절거림의 효과는 대단했다. 감정의 찌꺼기가 사라지며, 순식간에 마음이 후련해졌다.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던 목소리도 감쪽같이 사라진다. 감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많은 책을 읽고 수없이 감정일지를 썼다. 책의 내용과 내면의 소리는 귓가에서 웅성거릴 뿐, 명확하게 마음에 닿지 않았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시간은 가끔 손길을 멈추게 했다. 진정한 깨달음은 가르침만으로 배울 수 없는 것! 부단한 생각과 침잠 그리고 인식에 경험이 더해져야 비로소 내 삶에 스며들고, ‘나’가 되는 것이다.
오늘 정처 없이 걸으며 깊이 사색을 하고, 쌀을 씻고 뜸을 들이며 기다림의 시간을 견뎠다. 익숙한 기질과 성향을 이겨내기 위해 내면의 소리에 부단히 귀 기울이며, 불편하고 힘겨운 시도를 했다. “나는 사색할 줄 아오. 나는 기다릴 줄 아오. 나는 단식할 줄 아오”라는 싯다르타의 말이 밤새 맴돌았다. 쾌청한 하늘은 어느새 어둠이 가득하지만, 멋진 꿈속에서 나와 우리의 축제는 더욱 즐겁게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