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책>을 읽고
책은 그대로인데 다만 책을 읽는 나는 조금씩 바뀐다. 나아지는 못하더라도 달라지기는 하는 것 같다. 40대를 넘기며 어떤 책을 다시 읽었고 어떤 책은 처음 읽었으며 여러 번 읽은 책은 또 새롭게 읽었다. 오래전 받았던 감동과 깨달음이 여전히 유효한지, 그때 읽고 이해했던 것들이 옳은 방향이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책 보다 밥> 중에서 -
다시 책을 펼친 지 3년이 지났고. 어느덧 인생의 후반부의 출발점이라는 40대입니다.
어릴 적부터 책'만' 참 좋아했어요. 읽지도 않은 책을 구경하고 그렇게 사들였어요. 무거운 가방에 꼭 책을 넣었고, 졸면서도 꾸역꾸역 책을 펼쳤어요. 책을 구경하느라 바쁜 눈동자의 움직임, 책을 만지는 손끝의 질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코끝을 자극하는 인쇄물의 냄새 그리고 빼곡히 찬 책장의 충만함이 좋았어요. 안타깝게도 기억에 남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것을 보면, 역시 책을 읽는 행위를 즐기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네요.
오르한 파묵은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다른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해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었고, 책을 통해 멋진 삶을 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인 거예요. 차마 입을 수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쇼윈도 속에 멋진 자태를 뽐내는 드레스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먹이를 포착하는 호랑이처럼, 붐비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이 가장 먼저 보였고 그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죠. 그 시간에 책이나 읽지…
꽤 오랫동안 책 속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 생각했죠. 가방에 열심히 책을 넣고 다는 것만으로는 절대 책의 참 맛을 느낄 수 없었고, 책 속에 있다는 길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갑자기 책이 감당할 수 없게 무겁게 느껴졌고, 책을 꺼내 던지고 책장을 비우기 시작했어요. 삶의 회의와 허무감 또한 무겁게 나를 짓눌렀어요.
가벼워진 가방과 비워낸 책장만큼, 한동한 마음이 후련하고 일상에 여유가 느껴졌어요. 세상에 책 외에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요! 책에 집착한 시간이 어리석게 느껴졌어요. 다양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시도했지만, 조급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 때문에 어떤 것에도 깊게 스며들지 못했어요. 일방적으로 책과 내외한 시간에도 책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무슨 계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책 한 권이 찾아왔어요. 모처럼 다시 책을 펼치자, 책 속에서 묘하게 다른 내가 느껴졌어요. 책 속을 빼곡하게 채운 검은 글자 주변에 넓게 펼쳐진 여백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제대로' 읽기 위해 검은 글자만 봤거든요. 그때부터 그 공간은 내 차지가 되었어요.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보다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낯설고 불편한 시간이 일상을 촉촉하게 적시기 시작했어요.
3년의 누적 시간과 인생 후반부의 출발점에 서 있어서 그럴까요? 요즘 부쩍 많은 생각과 고민이 책 속의 여백을 채우고 있어요.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붙들어 보이고 하고, 짙은 안개가 자욱한 미래를 애써 쳐다보기도 합니다. 누적 시간이 무심할 만큼, 여전히 책을 읽는 시간은 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해요. 하지만 책을 ‘제대로’ 읽는 것에 대한 기준은 크게 변했어요. 책 속 한 구절이라도 내 마음을 울리고, 책 속 한 문장이라도 삶에 변화를 이끌 수 있다면 충분하더라고요. 책 내용을 전부 이해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최대한 여백의 미를 살리고, 다음을 기약합니다. 아직은 재미없고 의미 없는 책을 과감하게 덮고 다른 책을 펼칠 용기가 없었어요. 하지만 인생의 후반전을 생각하니 앞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제는 과감하게 책을 덮는 용기를 억지로 내봐야겠네요. 어쨌든, “40대에 들어서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데 그 생각을 함께 나누고 펼쳐 갈 변함없는 친구가 있어서 참 든든합니다.
지난번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이유 또한 명확하게 모르겠네요. 그것이 궁금해서 긴 글을 읽었을 텐데 참 미안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더 이상 불행과 불안이 책을 펼치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책은 진정한 행복을 선물하더라고요. 책을 통해 삶을 진솔하게 나누는 인연이 생겼고, 웃음 짓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점점 읽고 싶은 책도 많아지고,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해보고 싶은 것이 늘어갑니다. 가끔 종이에 적는 것조차 숨이 찰 정도라, 모르는 게 약일 것 같기도 해요. 이것을 탐욕이 아닌 삶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라 생각하고, 일상에 잔잔히 펼쳐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선물은 ‘글을 쓴다’는 거예요. 책을 읽으며 도란도란 나눈 이야기를 내실 있게 풀고 기억하고 싶었어요. 뭐, 요즘은 쓰기 위해 읽는 것 같기도 해요. 지금 이 시간처럼.
가끔 누군가는 말하죠. 책이 밥 먹여주냐고. 책에서 그따위로 알려주냐고. 책을 읽었다는 사람이 그 정도냐고. 예전에는 그 말에 흠칫 놀라 책을 의심하기도 했는데요. 이제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나마 책을 읽어서 이 정도로 산다고. 책 덕분에 진심으로 웃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래서 체력이 될 때까지 계속 책을 읽으며, 욕심껏 살아가려고 합니다.
봄꽃처럼 다양한 생각이 피어나는 요즘, 생각의 꽃을 활짝 피우고, 옹골진 열매를 맺길 꿈꿔봐요. 좀 더 명확한 이유를 찾게 되면 다시 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