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다

<멋쟁이 낸시는 자신만만 화가>를 읽고

by 눈부신 일상
“라이오넬은 이 그림이 좋대. 처음에는 농담하는 줄 알았어. 그냥 까만 물감을 아무렇게나 흩뿌려 놓은 것 같았거든. 그런데 보면 볼수록 흥미로웠어. 어떤 부분은 레이스처럼 보이고, 또 어떤 부분은 거미집 같았어. 아빠도 이 그림을 무척 좋아했어”
- <멋쟁이 낸시는 자신만만 화가> 중에서 -


'어! 올해 목표를 적어둔 종이를 어디 두었지?'


2021년의 반절을 돌아보기 위해 몇몇이 모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잠시 올해 계획을 돌아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묵직한 침묵이 흘렀고, 그제야 허겁지겁 종이 한 장을 찾기 시작했다. 올해는 평소와 달리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상당히 무거운 마음으로 새해 계획을 세웠다. 애쓴 시간이 허망하게 종이가 어디 있는지 조차 아리송했다. 다행히 금방 다이어리 한편에 고이 꽂아 둔 종이를 발견했다. 계획을 잊고 지냈으니, 실천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다. 허망함과 자괴감이 빈칸을 가득 채운다.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뭔가 찾아야 한다! 빈 종이를 바라보며, 그동안 내가 찍은 무수한 점을 찾아 하나씩 이어가 본다. 시야를 가린 자욱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걸어온 길이 흐릿하게 보인다. “멈춤, 시도,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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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갇힌 듯, 무언가에 붙잡힌 듯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이었다. 움직이고 나아가기보다는 생각하고 머물렀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신나게 달려가는데, 혼자 뒤처지는 느낌이 들어서 두려웠다. 이루지 못한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어간 그림 속에는 한 번도 주저앉지 않고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며 애쓰는 내가 존재했다. 수없이 고민하고 시도하며, 조금 더 솔직해졌고 진정한 욕구에 대해 깊게 탐구했다.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알기 위해 속도를 늦추고 머물러야 했다. 계획처럼 시원하게 쭉쭉 뻗어가지 못했지만, 정성과 애정이 가득한 삶의 흔적이 참 좋았다. 내 삶이 그린 매력적인 그림이 푹 빠져 한 참 바라보았다.


멈춘 시간 속에 조심스럽게 <언젠가 리스트>를 꺼냈다. 하고 싶은 마음만 품은 채 시도하지 못한 것을 하나씩 시도했다. 화실의 문을 두드린 것도 다양한 시도 중 하나이다. 꽤 오래전부터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고, 주변에 화실이 없며 미리 포기했다. 막상 찾아보니, 아파트 상가 안에 자주 지나친 곳에 화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막연한 바람은 너무 쉽게 실현되었고,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있는 낯선 나를 매주 만난다. 설렘으로 마주한 시간이지만, 꿈과 현실의 격차는 너무 컸고 매 순간 부족한 나를 마주한다. 줄 하나 긋는 것도 조심스럽고,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종이가 찢어질 것 같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겨우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힐 때는 더 난관이다. 다양한 물감 중에 도대체 어떤 색을 선택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붓을 들고 허공에서 한참 멈춰있었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손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다음 손이 갈 곳을 관찰하는 일뿐이다. 한창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스케치북에 딱 붙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 선생님이 슬며시 내 어깨를 당기며 그림과 나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멀리서 그림의 전체적인 균형을 확인하게 한다. 그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그럴듯한 그림이 탄생한다. 멀리서 그림을 바라보니 꽤 멋지게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2021년의 반절을 돌아보며, 그동안 발자취를 이어서 그린 삶의 그림과 이 시간이 똑 닮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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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삶의 흔적이 그린 그림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며,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본다.


그림을 그리며 처음으로 ‘몰입’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그림을 그릴 때, 온전히 ‘지금, 이 순간’과 ‘과정’에 집중하며 시간이 정지한 듯한 경험을 한다. 지금까지 효율성만 추구하고 결과에 집착하는 삶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었다. 항상 지금 하는 일보다는 다음에 할 일을 걱정했고, 좋아하는 일보다는 당장 성과가 나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에. 나에게 몰입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매 순간 정성을 다해 탐험하는 것이다. 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진정 원하는 삶을 고민하고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시간과 에너지의 쓰임을 고민하지 않고 기꺼이 애씀을 허락하고 순간을 즐기는 삶의 모습이다.


그림에서 멀어져서 전체 균형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계속 생각할 것이다. 여러 번의 붓 터치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욕심내지 않고 조금씩 시도할 것이다. 모든 붓 터치가 의미 있으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 위에 대담하게 그림을 그릴 것이다.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기에, 남과 비교하며 조바심 내기보다 내 그림에 더 집중하고 정성을 더 할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시간에 온전히 몰입하고 즐기는 황홀한 그림을 상상하며,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밑그림을 그려본다. 2021년의 끝자락에 섰을 때 나는 어떤 그림을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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